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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氏歷史 硏究會

건중팔학사 (建中八學士)

文件储藏处/동도년대 782년

죽간일집의 저자 강릉유씨 시조 유전(劉荃)과 원성왕릉 석상(石像) 인물들은 서기 782년 중국 당나라 도래한 건중팔학사(建中八學士)들이다.

죽간일집의 저자 강릉유씨 시조 유전(劉荃)과 원성왕릉 석상(石像) 인물들은 서기 782년 중국 당나라 도래한 건중팔학사(建中八學士)들이다. | 文件储藏处/동도년대 782년

송화강 2021. 3. 16. 07:53

http://blog.daum.net/rosy900/5667894

유전과 건중팔학사 그리고 원성왕릉의 석상 인물들 관련성

서기 782년 한반도에는 중국대륙으로 부터 매우 역사적인 팔학사팀이 들어온다. 이곳에서 이 건중팔학사의 한반도 도래가 한반도 역사에서 매우 역사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建中八學士

건중팔학사라는 이름은 무엇인가.

한반도는 중국과 가까운 지리적 관계로 역사상 수많은 팔학사(八學士) 팀들이 건너 온 기록이 있다. 그 많은 팔학사의 한반도 도래에도 불구하고 그 팔학사팀들이 그 도래 年度와 소속 명단등 확연히 나타난 팔학사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그리고 그 한반도 도래 후의 행적 기록도 없다.그런데 이 건중팔학사는 한반도 도래 시기와 그들의 행적 그들의 관직 후손등이 전해지는 팔학사이다.

 

1.왜 건중팔학사(建中八學士)라는 이름을 붙이는가.

(해설):

연호표

가.우선 건중(建中)이란 무엇인가를 알아 보자.

"建中"이란 중국 당나라 덕종(徳宗)의 연호로써 그의 25년간 치세 기간중 갖었던 3개의 연호 즉 건중(建中),흥원(興元),정원(貞元)중 첫 번째 연호로써 서기 4년간(780년,781년,783년,784년) 사용했다.그런데 이들 유전(劉荃)을 포함한 8학사의 한반도 도래 년도는서기 782년도로써 바로 건중년간(서기 780-783년)에 해당한다.수많은 한반도 팔학사팀 가운데 특별히 구별해야 할 필요성이 있으므로 다른 팔학사와의 새로운 식별을 위하여 건중팔학사라는 명칭을 부여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나.그런데 왜 특별히 다른 팔학사와 구별할 필요성이 있는가.

이들은 중국의 당나라 조정(朝廷)에서 고위 관료로 근무하다 서기 782년 8월 한반도에 상륙한후 곧 이신라 조정에 합류함으로써 한반도 즉 신라 역사의 상대(上代:BC 57-AD 654),중대(中代:AD 654-780) 하대(下代:AD 780-936)의 3개의 신라시대를 구분 짓는 중요한 요소인 매우 특별한 역사적 모멘텀을 갖게 되는 바로 신라하대 신라 구분의 그 주역인 8인의 당나라 출신 고위 기성 정치인 팀이기 때문이다.

 

다.그런데 왜 이 팔학사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일까

이들 팔학사팀은 서기 782년도 경북 구룡포 해안을 통하여 상륙한후 일정한 짧은 기간을 구룡포에서 새로운 풍토에 대한 낯선 이국생활의 적응기간이 지나자, 서기 784년도에는 이미 당 덕종이 신라에 파견한 지절사(持節使) 호부랑중(戶部郞中) 개훈(蓋塤)을 신라 37대 선덕왕 5년 신라궁중에서 만나게 된다.

 

삼국사기 선덕왕편의 기록을 보면 선덕왕 6년 서기 785년 정월(正月) 지절사 개훈이 왔다는 기록이 나온다.이 기록은 강릉유씨의 지금 도시조(都始祖)이며 이 건중팔학사의 일원으로 한반도에 와서 사는 동안 남기신 죽간일집(竹諫逸集)이라는 시문집의 목판본에 "甲子春逢上國星軺故人"이라는 기록이 나오고 있다.

 

이 강릉유씨 유전이 남긴 죽간일집에도 삼국사기 선덕왕 때의 기록과 완전히 일치하는 기록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甲子春逢上國星軺故人" 이 기록은 갑자춘(甲子春)인데 갑자년은 바로 서기 784년도가 된다.

 

삼국사기 선덕왕조의 기록에는 서기 785년 정월(正月)에 당 덕종이 보낸 지절사 호부랑중 개훈의 기록이 나오지만,선덕왕은 그해 정월 13일 사망하므로써 이 당덕종이 보낸 지절사 개훈(蓋塤)의 신라 궁궐 도착은 이미 그 년도로써는 전년인 784년이 되어 죽간일집의 연도 즉 갑자춘(서기 784년 봄) 이 됨으로써 강릉유씨 문중기록인 갑자춘(甲子年)과 일치한다고 보아도 차이가 없을 것이다.옛날 신라당시는 교통 통신이 지금과 달라 거의 없다고 봐야 하는 시대임을 감안 당시 중국의 대 신라,대 일본 사절들의 여행기간은 거의 1,2년의 오랜 기간이 걸렸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신라의 경주에서 중국 지금의 섬서성 西安(당시 長安)까지의 여행이었다.

 

라.이 당나라 지절사가 신라 선덕왕때 신라에 왔다면 그 정황은 어떤 모습으로 기록에 남아 있는가

삼국사기에는 신라 선덕 왕조에 서기 785년 기록에 한 줄 언급되어 있지만 유전(劉荃)이 남긴 죽간일집의 두 수의 시문을 이곳에서 잠시 소개코자 한다.죽간일집에는 모두 제목으로 구분하면 132수(首)의 시문이 있다.

 

그중 2수의 시문이 이 신라 선덕왕때 중국에서 온 호부랑중 개훈을 신라궁궐에서 맞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첫 시문을 보자.제목이 봉상국성초고인(逢上國星軺故人:고급 사절 수레 타고 온 옛 친구를 맞이 하다)라는 시문(詩文)이다.

이미 782년도 구룡포에 도착해서 2년후 서기 784년도에는 즉 갑자년(784년)에는 이미 신라궁에 와서 근무하면서 이 중국에서 보낸 성초(星軺) 타고 온 옛 당나라 궁궐에서 함께 일했던 옛 동료를 맞는 시문이 죽간일집에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 성초(星軺)는 무엇인가.星軺는 황제가 보낸 사절이 타는 고급 수레를 의미한다. 중국 역사에서 별성자 "星"은 바로 황제를 나타내며,중국어의 영어 번역에서 "Imperial"로 번역되고 있다.

 

이 고급 수레타고 온 호부랑중(戶部郞中) 개훈(蓋壎)을 맞는 모습이다.죽간일집에 나타난 두편의 시문을 차례로 소개하고져 한다.

 

 

1.逢上國星軺故人 中國에서 使臣온 친구를 만나서(서기 784년 갑자년)

 

春花秋月幾相思 봄 가을로 몇번이나 그대 생각했지만

此地逢迎本不期 여기서 만날 줄은 정말 몰랐소

爲問皇朝聖天子 묻노니 皇朝의 天子께 옵서

平安依舊袞裳垂 곤룡포(袞龍袍)에 如前히 平安하신가

 

2.送上國故人 中國의 친구를 이제 송별(送別)하면서 (살구꽃 핀 다리위에서 송별 785년)

 

春風分手杏花橋 봄바람에 杏花橋에서 작별을 하니

驛路蒼茫萬里遙 머나먼 萬里길 驛路가 아득하네

故舊諸公如問我 벗들이 내 소식을 묻거들랑

爲言來在海東朝 東國에 와서 잘있다고 말해주게나

 

 

마. 신라의 상대 중대 하대의 三代의 시대 구분중 특히 하대(下代)의 특징은 무엇인가.

이들 건중팔학사는 한반도 역사에 있어서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고 했는데 그럼 이들이 들어온 신라 新羅下代 문화의 특징은 무엇일까.위의 라항의 기술에서 이미 782년도 한반도에 온 이들 팔학사는 2년이 안되어 한반도 적응기간을 거치고 784년도가 되면 이미 신라궁궐에서 선덕왕 5년 당나라 지절사(持節使) 개훈(蓋壎)을 맞아 시문을 남긴다.

 

그리고 785년 정월 13일 선덕왕(宣德王)이 사망하고 이어서 785년도에 신라 제 38대 원성왕(元聖王)이 집권하여 14년간을 집권한 후 서기 798년 사망한다.그리고 죽간일집의 저자 유전(劉荃)의 그곳 경주에서 멀지않은 영천(永川) 땅으로 서기 800년 10월 이거하여 그곳에서 22년을 살다가 서기 822년 사망한다.

 

그런데 785년 집권한 원성왕때 부터 신라 조정에는 매우 활발한 변화가 이루어진다.원성왕 원년인 서기 785년에는 전국의 통치단위인 총관(摠管)을 도독(都督)으로 바꾼다.그리고 이어서 원성왕 4년인 788년에는 중국 唐代의 과거제도중 명경과(明經科)를 참조하여,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가 설치된다.

 

지금까지 국학(國學)을 나온 이들 또는 활쏘기 중심의 인재 선출 방식에서 한층 업그레이드한 고급 학문을 거친 새로운 인재선발 방식이 도입된다.이 독서삼품과는 후일 과거시험의 전신이 된다. 여기에서 중국 당나라의 명경과를 참조해서 원성왕 788년 신라의 독서 삼품과가 설치되는데 이 과정을 우리는 주목(注目)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즉 이 신라의 독서삼품과를 보면 이제 곡례(曲禮)와 효경(孝經)을 읽은 자를 하품(下品),곡례와 효경 그리고 논어(論語)를 읽은 자를 중품(中品),논어와 효경 예기(禮記),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과 문선(文選)을 읽은 자를 상품(上品)으로 하는 등 매우 강력한 우수한 인재선발 과정이 개설됨으로써 종전의 인재선발 방식에서 획기적 새로운 인재선발방식이 채용되게 되는데 이 중국의 당나라 명경과(明經科)의 과거제도가 도입되는 과정은 바로 이 건중팔학사(建中八學士)들의 역할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게 생각 할 수있는 과정에 관한 배경을 잠시 이야기 해 보고져 한다.이들 건중 팔학사는 당 덕종조의 혼란한 궁중의 피비린내 나는 상황에서 고국을 떠나 온 한림학사(翰林學士)의 학위를 가진 최고급 인재들로써 강릉유씨 도시조인 죽간일집의 저자 유전(劉荃)은 동도(東渡)하여 올 당시 32세로써 한림학사의 신분으로 그 직위가 현재의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나라의 최고 국방담당인 병부상서(兵部尙書)였으며,다른 동료 7학사들은 모두 유전이 남긴 죽간일집에 유전이 준 시문들에서 그 부르는 중국에서의 관직과 명칭을 보면 다음과 같다.

 

망명 동기에 관한 참고 글

cafe.daum.net/rose901/S9rW/1

 

바.건중팔학사의 당나라에서의 관직과 학위에 관하여

 

(1) 강릉거창유씨 시조 유전(劉荃): 서기 751년 중국 하남성 낙양시 하양(河陽) 출생 병부상서 후손 족보 있음 후손의 수는 한반도에 약 삼사십만명으로 추산되고 있음.궁중 영재(英才)교육기관인 이영전(邇英殿)에서 수학(修學) 한다.

 

(2) 나주평택임씨(羅州平澤林氏) 시조 임팔급(林八及):한림학사(翰林學士)

◆:2002년 4월 25일 전국임씨중앙회에서 펴낸 임씨상계보감(林氏上系譜鑑)의 기록에 의하면 임팔급은 서기 765년 을사년(乙巳年) 중국 하남성 영보시(靈寶市,당나라 당시 지명 弘農) 출생이며 서기 782년 한반도 구룡포 동도해 올 당시의 나이는 18세인데 이미 등과(等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족보가 있으며 현재 100 수십만명의 후손이 우리나라에 살고 있다.

 

(3) 남양송씨 송규(宋圭) 현재 족보를 지닌 후손들이 전남 고흥군 동강면을 세거지로 전국에 분포해서 살고있다. 송규의 관직은 어사대부(御史大夫)이다.

 

(4)上記의 세 문중이 우리나라에 족보를 지니고 그 후손이 번성하여 있음에 비하여 기타 5명의 건중팔학사의 후손은 지금까지 밝혀지고 있지 않다.단지 건중팔학사중 권지기(權之奇)에 관하여는 죽간시문에서 그의 만사시(挽辭詩)에서 영특한 자식이 있음을 나타내고 있어 그에게는 아들이 있었음을 알 수있으나 현재 찾을 수없어 한반도의 안동권씨 문중에 흡수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직위는 權翰林으로 지칭되고 있다.

 

(5) 설인검(薛仁儉) 薛學士로 불리고 있다.

(6) 허동 (許董) 許學士로 불리고 있다.

(7) 최호 (崔冱) 崔侍郞으로 불리고 있다.

(8) 공덕수(孔德狩) 孔中郞으로 불리고 있다 이상이 지금까지 나타난 당시 팔학사의 관직이다.

 

이들 건중팔학사(建中八學士) 모두가 문인(文人),무인(武人)들로 구성된 당나라 장안(長安) 궁중의 최고 관리직의 한림원 출신의 한림학사들로써 최고의 인재들임을 알 수있다.

 

이들은 서기 785년부터 시작되는 원성왕 집권 기간을 통하여 독서삼품과를 설치하는 때에 당나라 명경과를 참조하여 도입하며,그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되며 오늘날 우리나라 한국의 발전에 핵심적 동력을 제공한 신라 원성왕 즉 신라하대의 시대구분 단계의 핵심 인물들로 당나라 궁중의 핵심 관료출신들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신라궁궐의 규모는 당나라 궁궐의 규모보다는 훨씬 적은 규모였음은 우리가 잘 알수 있는 것이다.그 작은 신라궁중에 8인의 당시 당나라 궁궐의 최고 학부를 마치고 높은 관직에 올라 실무를 쌓은 원성왕 시대의 말하자면,준비(準備)된 인재 집단이었던 것이다.

 

 

사.유독 신라 원성왕릉에만 있는 외국인풍 석상들의 비밀을 풀 단서들

신라의 왕들은 모두 56명이며 그중 많은 왕들의 무덤이 경주와 그 주변에 있다.그런데 혹자가 말하는 서역인 같은 풍모를 지닌 석상들이라고 하는 이 外國人 모습을 띤 이들 이상한 석상들은 왜 14년간 집권한 원성왕릉에만 세워져 있을까.

 

이는 원성왕 때에 중국 당나라에서 온 기성 고위급 관료들의 강력한 영향력이 얼마나 강렬한 작용을 신라문화에 기여했는가를 나타낸다고 볼 수는 증표가 될 수있다고 할수 있을지 모른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의 역사학계는 이들 인물들의 존재를 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그런데 이 석상의 인물들이 지금까지 미스테리로 남아 있는 이유가 바로 300년 잘못 알려진 건중팔학사의 착오난 한반도 동도(東渡)년대에 있다.

 

이들의 한반도 동도년대는 죽간일집의 저자 팔하사의 한 분인 유전의 후손가문인 강릉유씨 문중족보에 고려 문종 36년 즉 서기 1082년도 이 팔학사가 동도해 왔다고 기록된 탓이다.그후 유전(劉荃)의 경북 영천 묘소에서는 1902년에 묘지석(墓誌石)이 출토되고 그 지석에 기록된 묘지명(墓誌銘) 글에 건중병자(建中丙子) 년도에 유전의 맏아들 견규(堅規)가 태어났다고 새겨저 있음에 의하여 정확히 현행 그들 족보에 기록된 서기 1096년 3월 15일과 완전 정확히 5갑자 즉 300년 착오난 기록임이 발혀져서 이 고려 문종 36년(서기 1082년) 동도했다는 기록이 이제 신라 선덕왕 3년(서기 782년) 동도 사실로 수정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건중팔학사는 중국 宋나라 신종(神宗)때 사람이 아닌 당나라 덕종(德宗)때의 당나라 관료들로 그 연대가 올라가는 것이고 유전이 지은 죽간일집 시문의 연대도 신라시문으로 그 연대가 격상케 된다.

 

아. 건중팔학사의 망명동기,중국역사상 최고의 악신(惡臣) 재상(宰相) 노기(盧杞)의 악정과 안록산 여파의 계속되는 공격을 받아 정정이 심각히 불안했다.

이 유능한 고위 관직의 학자 출신들이 왜 그 궁중생활을 버리고 물설고 낯설은 이국땅에 고국의 처자식을 버리고 떠나 왔을까 궁금해 하는 것이다.잠시 서기 780년도 이제 집권하는 당 덕종 집권 초기에 등용하는 중국역사에 등장하는 최고의 악독한 재상(宰相) 노기(盧杞)라는 인물을 살펴 보자.

 

盧杞(?~785년) 하남성 滑縣 사람이며,당조(唐朝) 재상(宰相)으로 중국 역사상 최고의 추남 악신(惡臣)이었다.건중년초에 입조(入朝)하여 어사중승(御事中丞)에 임명되고 건중(建中) 二年(서기 781년) 二月에 어사대부(御史大夫),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가 된다.10일 후에는 문하시랑(門下侍郞)에 다시 임명되고,평장사(平章事)가 된다.

 

노기(盧杞)는 재상이 되자,유능한 궁중의 신하들을 시기질투하고 파벌을 일으켜서 자기편을 요직에 기용하고 조금이라도 불순종하는 자를 사지(死地)로 몰아 넣는다, 명신(名臣) 양염(楊炎 781년 사망),엄영(嚴郢 783년 사망),장일(張鎰 783년 사망) 안진경(顔眞卿 784년 사망) 차례로 노기(盧杞)의 독수(毒手)에 죽어간다.그리고 군수물자를 위한 징벌적 조세를 신설 징수하자 온 장안은 곧 교역(交易) 활동이 중지하고,한순간에 천하는 원성으로 뒤덮인다.

 

당 덕종(徳宗) 이괄(李适)은 봉천(奉天)에서 군벌 (軍閥) 주자(朱泚)에게 포위된다.이러한 삼엄한 그리고 극치의 혼미한 정란(政亂) 가운데 건중팔학사는 서기 782년 노기의 입조(入朝) 서기 780년이후 혼란기에 당의 궁중을 피신하여 한반도로 이주하게 되는 것이다.

 

무서운 정국(政局)이요,정정(政變)의 세상을 피해 그 궁궐의 대신급 8인의 건중팔학사가 한반도의 험난한 뱃길에 오른 것이다..이들이 바다를 건너며,읊은 한 수의 싯귀들이 지금 전해오고 있다.東渡八學士詩를 이곳에 소개한다.이러한 노기(盧杞)도 서기 785년에는 지방으로 좌천되어 그곳에서 사망한다.

 

이렇게 건중할학사가 한반도에 와서 신라 궁궐에 합류하게 되는 것이다.악신 간신 노기의 독기어린 악정의 피해자들 망명객의 이동이 신라 하대문화의 촉매재가 되어 한반도 오늘날 발전에 기여한 동인이 되었다면 이 역사상 사건도 항상 있어온 역사의 아이러니중 하나라고 할 수있을까.

 

 

建中八學士東渡詩 건중팔학사 동도시

 

劉荃:

波濤闊矣兮,舟楫利逝

(파도는 넓음이여,뱃길이 편히 가도다)

 

林八及:

八人浮海兮,桂棹蘭檣

(여덟 사람이 바다 건너옴이여,계수나무 돛대에 난초 삿 대로다.)

 

許董:

吾徒東矣兮,可以免禍

(우리들은 동쪽으로 가니 화를 면할 수 있다네.)

 

 

宋奎:

接淅而去兮,謝暗投明

(급히 가노니,암흑은 가고 광명으로)

 

權之奇:

賢士出東兮,竭誠盡忠

(어진 선비 동쪽으로 가니,지극한 忠과 誠 모두 끝이라.)

 

孔德狩:

見機而作兮,疎廣之徒

(기미를 보아 행함이여 소광과 같은 사람들이로다)

 

薛仁敬:

仙李運衰兮 賢士被讒

(잘 나가던 李氏朝의 운수가 다하였으니 賢士들이 참소 를 당하는 도다.)

 

崔冱 ;

李老入海兮,殷道衰亡

(李氏 시대는 저물고<老> 완전히 지니<入海>,은도(殷道)도 쇠망하는도다.)

 

이처럼 역사상 다른 팔학사 팀들과는 다른 그 망명동기는 물론 신라 조정에 합류한 연대와 인물의 내용 연대등이 분명히 남아 있는 매우 특수한 경우인 것이다.다이나믹한 신라하대 문화의 생성은 이들 건중팔학사의 신라조정 합류와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알 수있다 하겠다.

 

 

자.유전(劉荃)이 남긴 죽간일집(竹諫逸集)

서기 782년도 구룡포를 통하여 한반도에 들어와 40년을 살다간 당나라 덕종조의 병부상서를 지낸 관료출신 한림학사는 한반도에 살면서 죽간일집이라는 132수의 주옥같은 시문을 남긴다.이 132수의 시문(제목만으로 표기한 숫자)으로서 그중 66수의 시문은 순수 격조 높은 한시(漢詩)들이며 다음 66수의 시문은 신라시대의 모든 상황들과 저자 유전의 한반도 오기 이전의 중국생활을 그리는 시문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역사성을 띄 66수의 시문들은 앞서 언급되는 신라 원성왕조의 역사 합류는 물론 원성왕릉의 외인풍의 무인상 문인상의 미스테리한 석상의 비밀을 풀 열쇠를 지닌 아주 소중한 시문들이다.그리고 봉황대(鳳凰臺)라는 명칭이 들어간 시문등은 지금 설이 분분한 봉황대의 역사를 밝히는데 아주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죽간일집의 영주자견(永晝自遣)이라는 시문에서는 죽간 유전(劉荃)께서 신라 원성왕때의 그 직책이 무엇이었던가를 알수있다.잠시 소개함으로써 그 죽간 유전의 일생을 탐구하는데 도움을 얻고자 한다.

 

 

永晝自遣 긴긴해를 보냄

 

悠悠宦跡滯要津 오래된 벼슬자취 要職에 머무르니

軍國安危繫此身 국가(國家)의 안위(安危)가 이몸에 매였구나

未報涓埃生白髮 작은 성은(聖恩)도 갚지 못하고 백발(白髮)이 되니

無言半晌似含醇 말없이 반나절을 술에 취한듯

 

이 시문에서 유전(劉荃)은 국가의 안위가 이 몸에 매었다고 시를 읊고 있다.이러한 글을 시문에 남길 수있는 사람은 당시의 왕의 신분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는 필시 당시의 국방의 최고 책임자임에 틀림없다.그렇다면 유전은 당시의 신라 원성왕때에 신라궁궐에서 최고의 국방을 담당한 위치의 인물이다.이를 알아 볼수 있기 위해서는 그가 중국 당나라 조정의 덕종조에서 그의 관직이 현재의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병부상서(兵部上書) 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132수의 죽간일집 시문중 역사편의 66수 시문중 2수의 병아강무(兵衙講武)라는 시와 또 한편의 병아시사(兵衙試射)를 통하여 죽간 유전이 궁중의 병무를 담당하는 직책에 있었음을 알 수있다.따서서 원성왕때의 그 강렬한 국방의 이미지를 간직했던 인물이 그 원성왕릉의 그 외인풍의 석상의 주인공이 아닐까 하는 추론에 도달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