劉邦的祖先源於三皇五帝之堯帝
原创:粤惠阳刘爱民
유방의 선조는 三皇五帝인 堯帝에 이른다.
저자:월혜양(粵惠陽) 유애민(劉愛民)
帝堯之先祖上溯黃帝,1、黃帝軒轅氏→2、玄囂少昊氏→3、蟜極→4、帝嚳高辛氏,至其父帝嚳,已經是黃帝之曾孫了,帝嚳生而神靈,十五歲輔佐顓頊帝,受封於辛。到三十歲代顓頊(高陽氏)為天子,以其肇基於辛,故號高辛氏,都於毫(今河南偃師縣),日月所照,風雨所至,莫不服從。
제요의 조상을 올라가면 황제에 이르며, 1.황제헌원씨-> 2.현효소호씨-> 3.교극-> 4.제곡고신씨, 그의 아버지 제곡에 이르면, 이미 황제의 증손이 되고, 제곡은 태어나서 신령했으며, 15세에 전욱제(顓頊帝)를 보좌하며, 신(辛)에 봉해진다. 30대에 이르면, 고양씨(高陽氏) 전욱(顓頊)은 천자가 되고, 이로써 신(辛)나라에 기초를 세우며, 고신씨(高辛氏)라는 이름을 얻게 되며, 지금의 하남성 언사현인 호(毫)에 도읍을 정하고, 해와 달이 비취고, 바람과 비가 닿는 곳 어느 곳이나 복종치 않는 것이 없었다.
帝嚳正妃薑嫄,有邰氏,生子棄,史稱後稷,其後代姬發(周武王)建立了周皇朝;次妃簡狄,有娀氏,生子契(xie),其後代成湯建立商皇朝;三妃慶都,陳鋒氏,生子放勳,即唐堯;四妃常儀,娵訾氏,生子摯,生女辛女;五妃建疵(與簡狄為姐妹),有娀氏,生臺璽。
제곡의 정비(正妃) 강원(薑嫄), 유태씨(有邰氏)는 아들 기(棄)를 낳으며, 역사에서는 이를 후직(後稷)이라 부르고, 그 후대 희발(姬發) 주무왕(周武王)은 주황조(周皇朝)를 세우고: 둘째 비 간적(簡狄), 유아씨(有娀氏)는 아들 설(契)을 낳는데, 그 후대 성탕은 상황조(商皇朝)를 세우며,: 셋째 부인 경도(慶都), 진봉씨(陳鋒氏)는 아들 방훈(放勳)을 낳는데 이가 곧 唐堯이며: 넷째 비 상의(常儀), 취자씨(娵訾氏)는, 아들지(摯)를 낳고, 딸 辛女를 낳는다: 다섯째 비(妃) 건자(建疵)(간적과 자매가 됨) 유융씨는 대새(臺璽)를 낳는다.
目录
一、帝堯誕生伊耆地,隨母親育於唐地
二、受封於唐為唐侯,禪讓為帝稱帝堯
三、定完善政治制度,制定曆法授農事
四、夏鯀作城治水患,洪水濤天失敗終
五、訪賢納能禪天下,勤儉聽諫了民意
六、感靈淬精敬上蒼,造圍棋以教丹朱
七、察舜之德以禪位,駕崩真身葬谷林
八、晚年封子誕育地,劉姓之源始唐地
목록
一. 제요는 이기지(伊耆地)에서 나고, 어머니를 따라 어당지(於唐地)에서 자란다.
二. 唐에 봉해져서 당제후(唐帝侯)가 되며, 제왕을 선양받아 제요(帝堯)라 칭함을 받다
三. 정치제도를 확립한 후, 역법을 제정하여 농사에 적용시킨다.
四. 여름에 곤(鯀)은 성벽을 쌓아 치수하며, 홍수로 인한 재해를 없이 한다.
五. 현(賢)을 찾아 가서 천하를 양위하고, 근검하며 민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六. 깊은 영혼으로 정성 드려 하늘에 경배하며, 바둑을 만든 후 아들 단주(丹朱) 교육
七. 순(舜)의 덕을 보고 나서 제위(帝位)를 선양하고, 죽자 그 몸은 곡림에 장사한다.
八. 만년에 아들을 나서 기른 곳에 봉하고, 이로써 劉姓의 근원이 당지(唐地)가 된다.
참고 : 당지(唐地)란 지금의 山西省 南部이다.
后世纪念地
후세 기념지
一、帝堯誕生伊耆地,隨母親育於唐地
一. 제요는 이기지(伊耆地)란 땅에서 나고, 어머니 따라가 당지(唐地 )에서 자람
帝嚳的第三個妻子名叫慶都,她是伊耆侯(《史記》作“陳鋒氏女”)的女兒。慶都成婚以後仍留住娘家,住在孤邑(今河北唐縣城東北10裏),這是母系氏族時代的規矩。
제곡의 셋째 부인은 경도(慶都)라 불렸고, 그는 이기(伊耆)제후의 딸 이였다.(사기<史記>에는 “진봉(陳鋒)씨의 딸) 경도는 바로 그 이기땅 제후의 딸이다. 경도는 결혼 후에 여전히 친정에 있으며, 지금 하북성 당현성 동쪽 북쪽 10리 고읍(孤邑)에 사는데, 이는 모계씨족 시대의 규율이었던 것입니다.
當地仍流傳唐堯出生故事:某年春正月末,慶都與父母坐上一小船,於三河之上遊覽,正午時分,忽然刮起一陣狂風,迎面天上卷來一朵紅雲,在小船上形成扶搖直上的龍捲風,仿佛這旋風裏有一條赤龍在飛舞。老兩口驚恐萬狀,可看女兒慶都卻若無其事的樣兒,還沖著那條赤龍笑呢。傍晚時,風住雲散,赤龍也不見了。
그곳에는 여전히 당 요제의 출생 고사(故事)가 전해지고 있었는데, 모년 봄 정월 말에, 경도와 부모가 함께 작은 배에 올라, 삼하(三河)강 위에서 유람할 때 정오쯤 홀연히 광풍이 불더니 하늘에서 붉은 구름이 와서, 그 배위에 회오리바람이 일고, 마치 그 안에 한 마리의 붉은 용이 춤추는 듯 했다.두 분은 공포에 질려있는데 딸 경도를 보니 오히려 아무 일도 없는 듯한 모습이었는데 아직 그 붉은 용은 웅장한 웃음으로 닥아 왔다. 저녁때쯤에 바람이 자고 구름은 흩어졌으며 적룡도 이제 없어졌다.
搭船返回途中,又刮起大風,卷來紅雲又出現了那條赤龍,不過形體小了些,長約一丈左右。因為它並未肆虐加害於人,老兩口也就不怎麼害怕了。
배에서 이제 타고 돌아 올 때, 또 대풍이 일고, 붉은 구름이 몰려오며 그 붉은 용이 다시 나타났는데, 그 형체는 좀 작아져 있었다. 길이가 한 자 정도 될까 했다. 그래서 결코 사람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을 정도였기에 이 두 분은 이제 겁나지 않았다.
晚上,老兩口睡了,可慶都卻睡不著。她閉著雙眼還不由得抿上嘴發笑。朦朧中陰風四合,赤龍撲上她身,她迷糊了。醒來時身上還留下腥臭的涎水沫子,身旁留下一張沾滿涎水沫的畫兒,上面畫著一個紅色的人像,臉形上銳下豐滿,八采眉,長頭髮,上書:亦受天佑。她將這圖畫藏了起來,從此以後,慶都就懷孕了
저녁때에 두 분은 잠을 잤는데 경도는 그러나 잠이 안 왔다. 경도는 두 눈을 감고 입을 오므려 웃어 보았다. 몽롱한 가운데 사방에서 음풍(陰風)이 몰려오더니, 붉은 용이 그의 몸에 덮쳐 왔다. 경도는 정신이 혼미해 졌다. 깨어 보니 아직도 몸에는 비린 냄새 나는 침 흔적을 느꼈다. 몸 주변에는 아직 침 자국 모습이 붙어 있는 듯 했다.그 위에는 붉은 색의 사람 모습이 그려져 있었는데, 얼굴 모습은 매우 풍만한 모습이었고, 제왕을 나타내는 팔채미의 눈썹에 머리털은 길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늘의 도움의 징조다. 경도는 이 그림을 머릿속에 깊이 각인 시켜 놓았다. 그리고 그 후 경도는 곧 임신케 된다.
她住在丹陵,過了十四個月,生蔔一個兒子。慶都拿出赤龍留下的圖文一看,兒子生得和圖上畫的人一模一樣。
경도가 단릉(丹陵)에서 산지 14개월이 되자 아들 하나를 낳았다. 경도가 적룡이 남긴 그림을 꺼내 들어 보니,태어난 아이의 모습과 그 그림 속의 사람 모습이 똑 같았다.
帝嚳聞報慶都為他生了兒子,本該高興,豈料他的母親恰在這個兒子降生的時候去世了。帝嚳是個孝子,為母親的去世哭得成了淚人兒,哪里還會有高興的心情呢。他為母親一連服孝三年,也顧不下慶都和兒子的事。
제곡이 경도가 그를 위해서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응당 기뻐해야 하건만, 제곡은 어찌 어머니가 마침 이 시각에 세상을 떠날 줄 알았으랴. 제곡은 효자여서 어머니 죽음에 울어서 울보처럼 보였고, 어디 하나 기쁨을 가질 수 없는 상태였다. 그는 이어서 삼년을 복을 입느라 경도와 애기의 일을 전혀 돌 볼 수 없었다.
慶都帶著兒子住在娘家,直把兒子撫養到十歲,才讓他回到父親的身邊。這個孩子就是後來的帝堯。所以帝堯誕生於外祖父家---河北省唐縣,小時生活於此,隨母親的姓為伊祁(耆)氏,後又稱陶唐氏。 帝嚳共生有五子:摯、棄、契、放勳(唐堯)、臺璽。放勳為第四子也。
경도는 아이를 데리고 친정에 머물렀다. 곧 이어서 아이를 열 살까지 키우자,
그가 아버지의 신변에 돌아 올 수 있었다. 이 아이가 바로 훗날의 제요이다. 그래서 제요의 탄생은 외조부의 집이었고 바로 하북성 당현이다. 어릴적 이곳에서 생활했고, 어머니를 따라 성은 이기씨(伊祁)(耆)로 하고, 후에 다시 도당씨(陶唐氏)라 칭했다. 제곡은 모두 다섯 아들을 낳았다: 지(摯),기(棄),설(契),방훈放勳(唐堯), 대새(臺璽).방훈은 넷째 아들이다.
二、受封於唐為唐侯,禪讓為帝稱帝堯
二.당(唐)에 봉지를 받아 당후(唐侯)가 되고, 제후를 선양받자 제요(帝堯)라 칭함을 받게 된다.
放勳是在母家生活到十歲才來到父親的身邊的,帝嚳為表對兒子養育之恩,遂各封兒子的誕育之地為其封地,長子帝摯隨母親常儀育於清化,故把摯封在了清化(今河南焦作市博愛縣城東),後承襲帝位。次子棄(後稷),父親把他封在了邰邑(今陝西咸陽市武功縣西南),賜姓為姬,是為邰侯。
방훈은 어머니 집에서 열 살까지 자란 후에 겨우 아버지의 신변에 오게 되며, 제곡은 아이를 키워준 은혜에 감사를 표한다. 마침내 아이가 태어난 곳을 이제 봉지(封地)로 주자, 장자 제지(帝摯)는 어머니 상의(常儀)를 따라가 청화(清化)에서 자란다. 청화(清化)는 지금의 하남성 남 초작시 박애현 성 동쪽이다. 그리고 제위에 오른다. 둘째 아들 棄(後稷) 기(후직)에게는 아버지는 그를 태읍(邰邑)에 봉(封)한다. 태읍은 지금 섬서성 함양읍 무공현 서남방에 있다. 그리고 차자 기(棄)에게 희(姬)라는 성을 주는데 그는 태읍(邰邑)의 제후가 된다.
第三子契,父親把他封在了商邑(今河南商丘市南),賜姓為子,是為商侯。
第四子放勳(帝堯),父親把他封在了唐邑(今河北保定市唐縣西北),仍為伊耆姓,是為唐侯。但是,父親在位時,他們都沒有到封國去,而是留在朝中輔佐父親。 父親帝嚳在位七十年,到一百零五歲那年就去世了,摯(號青陽氏)因是帝嚳的長子而受禪接帝位,是年十五歲的放勳繼續輔佐帝摯處理政務
셋째 아들 설(契),아버지는 그를 지금 하남성 상구시(商丘市) 남방에 있던 상읍(商邑)에 봉하고 자(子)라는 성을 내리자 그는 상나라 제후가 된다. 넷째 아들 방훈(帝堯),아버지는 그를 지금 하북성 보정시 당현 서북쪽에 있던 당현에 봉한다. 그리고 이기(伊耆)를 성으로 삼는다. 그리고 당후(唐侯)가 된다. 그러나 아버지 재위 때에, 그들은 그들의 봉국(封國)에 가지 않았으며, 그 아버지의 궁내에서 아버지를 도왔다. 부친 제곡은 70년을 재위하고,105세 되던 해에 죽었다.摯(청양씨라 칭했다)는 제곡의 장자였기에 제위를 물려받게 되었는데, 그때가 15세였던 방훈은 계속해서 제지(帝摯)를 보좌해서 정무를 처리해 주었다.
帝摯三位弟弟的才能都遠遠超過他,這使他十分不安。為了防止他們干預朝政,架空自己,他即位後,立刻頒發一道強制性命令,限所有在先帝朝受封的侯爵,十日內必須回到自己的封地去,拒不執行者,則收回封地削去封爵。他的三個弟弟只好乖乖地離開都城,帶著自己的家人回封國去了。
제지(帝摯)는 세 동생들의 재능이 자기보다 모두 훨씬 뛰어났었기에 이는 그를 참 불안하게 했다. 그래서 그들이 조정의 정무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잠시 자신의 됨됨이를 위장(僞裝) 하다가 그는 즉위하자 바로 하나의 강제성 명령을 반포해서 그의 모든 먼저 제후들이 내린 제후의 자격을 제한 시켜 버린다. 그리고 이에 거부하는 자에게는 곧 그의 봉지(封地)를 거두고 그의 봉지의 제후 권리를 박탈한다. 그래서 그의 세 동생들은 겨우 순순히 도성에서 물러나가 이제 자기의 봉지로 향하게 해 버렸다.
看著幾個弟弟都離開了都城,帝摯十分高興,便把自己的親朋好友拉入朝中為官,幫他管理朝政。他自己卻終日呆在深宮裏與妃子們享樂,很少過問朝中大事。於是,那些他所信任的大臣便借機利用手中的權力欺上瞞下,胡作非為,幹了許多不法的事情。而帝摯對此卻不聞不問,任由那些貪官污吏橫行。
이 몇몇 동생들이 이제 도성을 떠나는 모습을 보고 나서 제곡은 한껏 기뻐하면서, 바로 자기의 가까운 친구를 궁중으로 데려다가 관직을 준다. 그리고 그에게 조정의 정무를 관리하게 한다. 그리고 자기는 이제 깊은 궁궐에서 비빈들과 향락을 즐긴다. 그리고 궁중의 큰일들에게도 관심이 없다. 그러자 그가 신임했던 대신들이 이틈을 이용해서 수중의 권력을 이용해서 만천하를 속이게 되는 형편이 되고, 제멋대로 나쁜 일을 하게 되며,수많은 불법한 일을 하게 된다.그러나 제지(帝摯)가 이에 대해서 아무런 조치가 없게 되자, 이들 탐관오리들의 횡행을 방치하는 결과가 되고 만다.
各地百姓都怨聲載道,暗地裏紛紛詛咒帝摯早死。 史書上說,由於帝摯無德觸怒了上天,降下種種災難懲治人間。先是連年大旱,一些地方顆粒無收,接著又發生了蟲災、水災,災民們沒有活路,被迫背井離鄉到外地去逃荒,有許多人餓死在逃荒路上。
그러자 각지에서 백성들의 원성이 거리에 넘쳐나고 암암리에 제지(帝摯)가 빨리 죽어 버리기를 비는 저주의 소리가 넘치게 된다. 역사의 기록에는 그래서 제지(帝摯)는 하늘의 천제를 노하게 했고, 하늘은 인간에게 각종 재앙을 내려 징벌했다고 적혀 있다. 우선 큰 흉년이 연이어 몇 년을 계속되고, 어떤 지방에는 과일이 열매가 수확이 없고, 계속 충해(蟲災)와 수재(水災)가 이어졌으며, 이재민들은 살길이 없었다. 할 수 없어서 가난을 피해 고향을 떠나 외지를 향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길 위에서 굶주림을 맞았다.
面對自然災害給人民群眾所帶來的苦難,帝摯卻視若無睹,照舊癡迷於宮中的享樂。
而這時,居住在唐地的唐侯放勳,積極領導當地百姓抗災自救,他們攔河築壩,引水澆田,戰勝旱災,取得了豐收。唐國的百姓沒有一個人餓死,更沒有一個人外出逃荒。於是,各地災民紛紛投奔唐侯。放勳為了收買人心,把自家的所有積蓄都拿出來救助災民,贏得了百姓的讚揚。放勳在國民中樹立起了賢君的良好的形象,進一步發展和擴大了自己的勢力。
자연재해가 사람들에게 가져다 준 고난을 당하여, 제지는 오히려 이를 못 본체 하고, 여전히 궁중의 향락에 빠져 있었다. 이 때 에, 당지(唐地)에 살고 있던 당후(唐侯) 방훈(放勳)은 적극 그곳 백성들의 재난 방지 자구노력 활동을 적극적으로 이끌어 나갔다. 그리고 보를 쌓고 뚝을 막았다. 물을 끌어다 논밭에 물을 댔다. 그래서 가뭄을 이겨 나갔다. 그리고 풍성한 수확을 거두게 했다. 그래서 당국(唐國)의 백성은 아사자가 없게 되고, 또 타지로 굶주림을 피해 떠나는 이들이 없게 되었다. 그러자 각지에서 이 당후한테로 속속 몰려든다. 방훈은 인심을 얻기 위해 자기 집의 모든 축적된 소유를 내다 이재민을 구하며 백성의 찬양을 듣는다. 방훈은 국민에게 모법적 군주의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그리고 나아가 자신의 권세를 확대해 나간다.
傳說這時候天上出現了十個太陽,把地裏的莊稼和山上的樹木全都曬死了。一些毒蛇猛獸也乘機肆意橫行,殘害人類,人們陷入了極度的恐慌之中。放勳以拯救人類為己任,率領各部落民眾抗災自救,與邪惡勢力展開殊死搏鬥。他命神箭將軍羿射落了天上九個太陽,只留一個太陽在天上(羿是帝嚳時期的一名領兵大臣,因為善射,帝嚳賜給他一張紅色的弓和十支帶有白色羽毛的箭,讓他以自己的勇武去幫助和扶持那些弱小的部族和苦難的百姓,打擊和消滅那些仗勢欺人的邪惡勢力。
이때에 하늘에는 10개의 태양이 나타났다는 전설이 전해 오며, 이 태양들은 지상의 모든 농작물과 수목을 모두 태워 죽였다고 한다. 독사와 맹수들도 이틈에 맘대로 횡행하고, 인류를 죽이며, 인간들은 아주 공포 속으로 빠지게 되었다. 방훈은 인류를 구제함을 소명으로 느끼고, 각 부락 민중들의 자구적인 재해극복 활동을 이끌어 나가면서, 사악한 세력들에 맞서 전력을 다해 싸워 나간다. 그는 신전장군(神箭將軍) 예(羿)에게 명령을 내려 하늘의 아홉 개 태양을 쏘아 떨어뜨리도록 한다. 하나만 남기고 예(羿)는 제곡 시기에 한명의 병부대신이었고 활을 잘 쏘았으므로 제곡은 그에게 홍색의 궁하나와 십지(十支)의 모습을 지닌 백색의 깃털이 달린 화살을 주었었다.
從此,羿族以射聞名天下,後世傳人世代皆稱羿)。放勳又率領眾人殺死了九嬰、大風、猰貐、修蛇、封豨等惡魔和猛獸,使天下獲得了寧靜。放勳的品德和行為贏得了各氏族聯盟的一致擁護,紛紛推舉放勳為帝,呼籲罷免碌碌無為的帝摯。
그로부터 예족(羿族)은 천하에 궁술로 이름을 날리고, 후세 사람들은 그들을 예(羿)라고 칭하게 된다. 방훈은 또 무리들을 이끌고 구영(九嬰),대풍(大風),알유(猰貐),수사(修蛇),봉희(封豨)같은 악마와 맹수들을 죽이며 천하의 안녕을 획득케 한다. 방훈의 인품과 선행이 각 씨족연맹의 일치 옹호를 얻어 내자, 하는 일없이 지내는 제집을 파면하고, 방훈을 제후로 추대하자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게 된다.
帝摯在位九年,放勳聯合全國各大氏族向帝摯發難,逼迫他退位。帝摯雖然不甘心退位,但是,面對強大的氏族聯盟陣營和年富力強咄咄逼人的弟弟,自知無力抗爭,不得不走下天子的寶座,將帝位禪讓給放勳(二十四歲),改國號為唐,建立帝堯陶唐氏政權,史稱堯帝。好在唐堯念在兄弟情分上,並沒有為難他,仍舊將他封在莘邑(今山東聊城市莘縣),是為莘侯。關於這段經歷,歷史上記載略有不同.司馬遷《史記》記載雲:“帝嚳崩,而摯代立。帝摯立,不善,而帝放勳立,是為帝堯。”
제집의 제위 9년에 방훈은 전국의 각 대 씨족들을 연합시켜 제집을 향하여 비난토록 하며 그를 퇴위하기를 압박했다. 제집은 물러나기 싫었지만 이 강력한 씨족연맹 진영과 연부역강한 동생들조차 요구해 옴에 따라, 스스로도 당해 낼 수 없음을 알고, 부득불 천좌의 자리에서 내려온다. 그리고 그 제위는 방훈(24세)에게 주게 된다. 그리고 그 국호는 당(唐)으로 하고, 제요(帝堯) 도당씨(陶唐氏) 정권을 수립한다. 역사는 이를 요제(堯帝)라 칭한다. 당 제요는 이때 마침 운은 좋아서 형제간 우애에 어려움은 없었고, 여전히 그를 지금 산동성 료성시 신현(莘縣)인 신읍(莘邑)에 봉한다. 그리고 그는 신읍의 제후가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 있어서, 역사의 기록은 대개 거의 같다. 사마천 사기(史記)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제곡이 죽고, 지(摯)가 왕이 되었다. 제지는 능력이 모자라서 방훈이 제위를 이었고, 이가 요제가 되었다”라고.
皇甫謐《帝王世紀》說:帝摯之母位於帝嚳四妻最末,而摯於兄弟最長,得登帝位, 封異母弟放勳為唐侯。摯在位九年,才幹平庸,未能妥善管理國家。而唐侯堯仁慈愛民,明於察人,治理有方,盛德聞名天下。摯自覺不如堯之聖明,乃率群臣造訪唐侯而致禪。唐侯自知有天命,乃受帝禪,乃封摯於莘邑(今山東省聊城市莘縣)。
황보밀(皇甫謐)<제왕세기,帝王世紀>에 보면: 제지(帝摯)의 어머니는 제곡의 네 명의 처 중에서 그 위치는 맨 끝에 위치하고, 지(摯)는 형제중 제일 위인데.제왕의 위치에 오르며, 배 다른 어머니의 동생 방훈(放勳)을 당(唐)의 제후(帝侯)에 봉한다. 지(摯)는 9년을 재위하나 능력부족으로 인하여 국가 관리를 잘 해나가지 못했다. 그러나 당후(唐侯) 요(堯)는 인자하고 백성을 사랑했으며, 사람을 살펴보는데 매우 능해서, 통치에 능했으며, 그의 품덕(品德)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지(摯)는 자신이 요(堯)의 능력에 비해 부족함을 알게 되자, 군신을 이끌고 당후(唐侯)를 찾아 가 자리를 선양(禪讓)한다. 그리고 지(摯)를 신읍(莘邑)(지금 산동성 랴오청시 신현)에 봉한다.
清人馬骕《繹史》卷八《高辛紀》引《綱目前編》則說:“摯荒淫無度,諸侯廢之,而推尊堯為天子。”馬骕並在後加按語雲:“按帝摯或崩,或禪,或廢,諸說各不同也。”
청인마숙(清人馬骕) 역사<繹史> 제 8권 고신기<高辛紀>에는 강목전편<綱目前編>에서 인용한 글에서 말하기를: 집(摯)은 방탕하고 절제가 없어서 제후(諸侯)는 그를 폐하고 요(堯)를 천자로 받들었다. “馬驌並在後加按語(마숙병재후가안어)라는 책에서 말하기를: 제집(帝摯)이 죽거나, 선양하거나, 혹 폐위하거나 이 모든 경우는 모두 다르다”라고 되어 있다.
三、定完善政治制度,制定曆法授農事
三. 정치제도를 완벽히 정비하고, 역법을 제정해서 농사에 적용토록 하다.
帝堯即位後,在執政初期,還沒有基本的國家制度,國家只是部落聯合體,非常鬆散,不利於國家的統一管理,所以在堯積累了一定的施政經驗後,開始建立國家政治制度,其中很重要的一條就是按各種政務任命官員,在我國歷史上第一次建立較為系統的政治制度,為奴隸制國家的產生奠定了基礎
제요 즉위 후, 집정 초기에, 아직 기본적 국가제도가 서있지 못한 상태에서, 아직 나라는 단지 부락연합체 상태였고, 아주 산만했고, 국가 관리도 어려웠는데, 요(堯)는 일정한 시정경험을 쌓자, 국가정치제도 건립에 착수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항은 각종 부서마다 그 정무에 따른 관리를 임명하는 것 이었고,중국 역사상 제 1차 비교적 계통적 정치제도라고 할 수 있는 제도가 수립되고, 노예제 국가 탄생의 기초를 놓는다.
《尚書•堯典》上說,堯命令羲氏、和氏根據日月星辰的運行情況制定曆法,然後頒佈天下,使農業生產有所依循,“敬叫授民時”,他派羲仲住在東方海濱叫旸穀的地方,觀察日出的情況,以晝夜平分的那天作為春分,並參考鳥星的位置來校正;派羲叔住在叫明都的地方,觀察太陽由北向南移動的情況,以白晝時間最長的那天為夏至,並參考火星的位置來校正;派和仲住在西方叫昧穀的地方,觀察日落的情況,以晝夜平分的那天作為秋分,並參考虛星的位置來校正;派和叔住在北方叫幽都的地方,觀察太陽由南向北移動的情況,以白晝最短的那天作為冬至,井參考昴星的位置來校正。
상서, 요전<尚書•堯典>에서 말하기를: 요(堯)가 희씨(羲氏)에게 명령을 내렸고, 和氏는 일월성신의 운행 상황에 근거해서 역법을 제정하고 그 후 이를 천하에 반포했으며, 이 역법 달력에 따른 계절변화를 알 수 있게 함으로써 이에 따른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한다. 또 그는 대신(大臣) 희중(羲仲)을 동방해변에 있던 양곡(旸穀)이라는 지방에 보내어 일출의 상태를 관찰토록 했으며, 주야의 길이가 같은 날을 춘분(春分)으로 했으며, 아울러 조성(鳥星)의 위치 변화를 정정해 나감을 참고로 하였다. 또 희숙(羲叔)을 명도(明都) 지방에 가서 살게 하면서, 태양이 북에서 남으로 이동해 나가는 모습을 관찰케 함으로써, 낮 시간이 가장 긴 날을 하지(夏至)로 하였고, 아울러 허성(虛星)의 위치를 교정해 나감을 참고하였다. 화숙(和叔)을 북방의 유도(幽都)라고 하는 지역에 보내어 살게 하면서 태양이 남에서 북으로 이동하는 관찰케 하여 낮이 제일 짧은 날을 동지(冬至)로 했으며, 묘성(昴星)의 위치를 변화를 살피면서 그 변화치의 교정(校正)을 통해서 이를 참고한다.
二分、二分確定以後,堯決定以366日為一年,每三年置一閏月,用閏月調整曆法和四季的關係,使每年的農時正確,不出差誤。由此可知,古人將帝堯的時代視為農耕文化出現飛躍進步的時代。
二分、二至(춘분, 추분의 二分, 하지와 동지 二分 이것을 가르켜 “二分二至“라고 한다)가 확정된 후, 요(堯)는 366일을 1년으로 정하고, 매 3년마다 윤달을 두며, 이 윤달을 이용해서 역법(曆法)과 사계절의 관계를 조정하고, 매년의 농사 절기의 정확성을 기하도록 함으로써 오차가 생기지 않게 한다. 옛 사람들이 제요(帝堯) 즉 요임금의 시대를 농경문화 출현과 비약진보의 시대로 보고 있음을 이에서 알 수 있다.
四、夏鯀作城治水患,洪水濤天失敗終
四. 하곤(夏鯀)이 성곽(城郭)을 쌓아 치수하고, 홍수 피해를 막아내다.
帝堯的時代,又是傳說中的洪水時期。“湯湯洪水方割,蕩蕩懷山襄陵,浩浩滔天”,水勢浩大,奔騰呼嘯,淹沒山丘,沖向高岡,危害天下,民不安居。帝堯對此非常關注,徵詢四嶽(四方諸侯之長)的意見,問誰可以治理水患,四嶽推薦了鯀。帝堯覺得鯀這個人靠不住,經常違抗命令,還危害本族的利益,不適宜承擔這項重要的工作。但是四嶽堅持要讓鯀試一試,而且當時也找不出比鯀更合適的人選,於是堯任命鯀去治理水患。
제요(帝堯) 때는 곧 전설중의 홍수시대이다.“찰랑 찰랑 홍수가 넘치고, 넘실넘실 산을 싸고 언덕을 넘어 하늘에 닿으려 하네.” 물결이 너무 크고, 용솟음치며, 산과 언덕을 삼키며, 언덕으로 치닫고, 천하를 위협하고, 사람들은 안절부절 못하다.요제는 이에 대해 매우 근심하게 되고, 모든 지방 제후들의 의견을 구한다. 누가 이 환난을 구할 수 있는가. 각 지방에서 곤(鯀)을 추천해 왔다. 제요는 곤 이 사람은 믿을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늘 명령에 불복해 왔던 사람이니까. 그리고 자기 족인들의 이해도 해친 사람이라서 이 일을 맡을 적임자가 못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지방으로부터 계속 한번 곤에게 맡겨 볼기를 권할뿐 아니라 당시 곤보다 이제 적합한 인물을 구할 수 없다 보니까, 요임금도 곤을 임명해서 치수사업에 보낸다.
鯀是以造城廓來抵禦賜洪水的,文獻記載,鯀是中國歷史上始造城廓的第一人。《世本》載:“鯀作城。”《呂氏春秋•君守篇》也有:“奚仲作車,倉頡作書,後稷作稼,皋陶作刑,昆吾作陶,夏鯀作城,此六人者,所作當矣。” 另《吳越春秋》載:“鯀築城以衛君,造郭以守民,此城郭之始也。” 《淮南子•原道訓》更是給出鯀作城池的高度:“昔夏鯀作三仞之城
곤은 성곽을 쌓아 홍수를 막은 인물이라고 문헌에 나와 있는데, 곤은 중국역사상 처음 성곽을 쌓은 인물인 것이다. 세본<世本)>에 올라 있기를: “곤 성을 쌓았다고. 여씨춘추. 군구편<呂氏春秋•君守篇>에도 역시 그렇게 나와 있다.: ”해중(奚仲)은 차를 만들고, 창힐(倉頡)은 책을 냈으며, 후직(後稷)은 농법을 연구하고, 고도(皋陶)는 형법을, 하나라 곤(鯀)은 성을 만들고, 이 여섯 사람이 효시(嚆矢)라고 한다. 또 다른 오월춘추<吳越春秋>에 보면: “곤(鯀)은 축성(築城)하여 임금을 모시고, 축곽(築郭)하여 백성을 지켰다. 이것이 城郭의 시초이다” <참고사항, 성곽(城郭)이란 말은 성(城)은 內城을 말하며, 郭은 外城을 말함. 성곽이란 단어는 內城과 外城을 합쳐 부르른 말임 城郭>.<회남자.원도훈(淮南子.原道訓)에는 곤(鯀)이 쌓은 해자(垓子)에 둘러싸인 성곽(城郭) 즉 “城池”의 높이는 사람키의 세 길이나 되었다고 쓰여 있다.
鯀在治水九年,建造了許多城廓,雖可以保民於一時,然洪水來時,如猛獸之濤濤,根本無法抵抗,故鯀的治水毫無功績,失敗了。但在接下來的舜帝時代,鯀之兒子禹繼續治理洪水,將洪水徹底治理好,萬民安居樂業也。
곤(鯀)의 치수 9년째 되던 해는 이미 많은 성곽을 쌓았지만, 그러나 일시적으로 백성을 지킬 수는 있었지만 홍수가 나거나 맹수의 습격 같은 경우는 근본적으로 대항이 되지 못하였으므로 곤의 치수는 결코 성공했다고는 할 수 없어 실패였던 것 이다. 단 이어서 오는 순임금 시대에 곤의 아들 우(禹)가 계속해서 홍수를 다스렸고, 그 홍수를 아주 철저히 잘 다스린 덕분에 온 백성들은 편히 생업에 종사했다.
五、訪賢納能禪天下,勤儉聽諫了民意
五. 현자를 찾아 가서 천하를 선양(禪讓)하고, 철저히 민의의 소리를 듣다.
史載堯之功臣九人,或說十一人,可謂人才濟濟。但他唯恐埋沒人才,野有遺賢。所以他還常常深入窮鄉僻壤,到山野之間去尋查細訪,求賢問道,察訪政治得失,選用賢才。
戰國時莊周曾說:堯治理天下萬民,使海內政治清明,曾到汾水北岸的姑射之山,去參拜四位有道之名士,悵然若失,好像丟了天下。這四位有道名士為方回、善卷、披衣、許由。善卷重義輕利,不貪富貴,是有名的賢人;堯自覺德行達智不如善卷,認識到對於賢德的人,不能自驕自傲,必須謙恭好禮,以平民對待長者、學生對待老師的禮節去拜訪他,讓善卷居主位,堯站在下邊,面向北施禮求教。
역사에서는 요임금에게는 아홉 명의 공신이 있었다고 하는데, 또는 열 한명이라는 곳도 있다. 인재가 많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는 쓰지 않은 채 두는 인재가 있을까를 늘 걱정했다. 그래서 그는 시골구석까지도 가서 산야를 훌다싶이 인재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현자를 찾아 문답을 했으며, 찾아 가서 정치의 비평을 구하고, 현명한 인재를 찾아 썼다. 전국(戰國) 시대때 장주증(莊周曾)이 말하기를:요제가 천하만민을 다스릴 때,온 나라 정치가 맑고 깨끗했지만,그러자 전에 펀수이(汾水) 북쪽에 있는 요사산(姑射山)에서 네 분의 덕행이 있다는 명사(名士)를 찾아 참배하고는 실망했는데,그때는 마치 천하를 잃은 듯했다,이 네 분의 명사란 방회(方回),선권(善卷),피의(披衣),허유(許由)이다.권선(善卷)은 중의경리(重義輕利:의로운 전쟁을 중시했지만 그 물자의 준비에 필요한 이익도모를 경시함)했고,부귀를 탐하지 않았는데,이것이 유명한 현인이었기에:요제는 達智(총명 지혜의 경지)라고 함은 곧 권선(善卷) 같아서는 않됨을 깨닫고는, 현인(賢人)에 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된다. 곧 현인이란 스스로 교만 방자하지 않아야 하고, 필히 겸손하고 예의에 밝아야 하며, 몸을 낮추어 어른을 공손히 모실 줄 알아야 하고, 배움에 있어서는 스승에 대하여 예절로써 선생을 찾아 뵐 줄 알 것등을 스스로 인식하게 되자, 요제는 권선(善卷)을 윗자리에 모시고, 자신은 아래에 서며, 북쪽을 향하여 예로써 가르침을 구하게 된다.
《莊子》中記載:堯之師曰許由,許由之師曰齧缺,齧缺之師曰王倪,王倪之師曰披衣。披衣即蒲衣,亦寫作蒲伊,以其衣蒲故名。他居住於蒲穀山,堯親往拜訪,拜之為老師。今蒲縣太林鄉有蒲伊村,傳為蒲衣隱居之處,蒲伊村即由此而得名。蒲伊村附近有帝堯與蒲伊談論大道的地方,後稱講道臺。還有帝堯休息過的地方,後稱稅駕坡。蒲伊,人稱蒲伊子,他所在的方國後稱蒲子國,後來這裏稱蒲子縣,今稱蒲縣。清人留詩中有“蒲穀賢人懷寶去,平陽聖帝策輦來”的詩句,即指帝堯訪蒲衣子的故事。
장자<莊子>에: 요임금의 스승은 허유(許由)이고, 허유의 스승은 설결(齧缺), 설결의 스승은 왕예(王倪), 왕예의 스승은 피의(披衣), 피의의 스승은 포의(蒲衣)라고 되어 있는데, 포의(蒲衣)는 포이(蒲伊)라고도 쓴다. 바로 의포(衣蒲)를 갖고 이름으로 했다.(註:의포(衣蒲)란 부들로 만든 옷이란 뜻임).
그는 포곡산(蒲穀山)에 살았는데, 요(堯)가 친히 찾아와서 절한 후에 스승으로 삼았다. 지금의 포현(蒲縣) 태림향(太林鄉)에는 포이촌(蒲伊村)이 있다. 곧 전설에 따르면 포이(蒲衣)가 은거했던 곳이라 한다. 포이촌(蒲伊村)이란 바로 여기에서 온 지명이다. (註:포이촌은 지금 山西省 臨汾市에 있다). 포이촌 부근에는 요제(堯帝)와 포이(蒲伊)가 담론했던 담론대도(談論大道)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후에 강도대(講道臺)라 부른다. 또 요제가 휴식하며 지내던 곳이 있고, 이는 후에 세가파(稅駕坡)라 부른다. 세상에서 포이자(蒲伊子)라고 부르는 포이(蒲伊)가 살던 나라를 포자국(蒲子國)이라고 불렀고, 후에 이곳은 포자현(蒲子縣)이라고 부르다가 지금은 포현(蒲縣)이라고 한다. 청나라 사람이 남긴 시에는 “포곡현인은 보물 품고 가고, 평양성제는 책련타고 오네”라는 싯귀가 있다. 곧 요제가 포의자(蒲衣子)를 찾아 왔던 고사(故事)를 가리키고 있다.
《莊子》中記述,堯問許由:“齧缺可以做天子嗎?我想讓王倪邀請他。”許由說:“不好啊!那對天下將是一件危險的事情。齧缺的為人,聰明機智,反應敏捷,天分過人,而你要因他這些人事上的長處讓他接受實行天然之治的使命,那就錯了。
장자<莊子>에 요임금이 허유(許由)에게 묻기를: “설결이 천자가 될 수 있겠는가? 나는 왕예가 설결을 초청하도록 하고 싶네.” 라고 하자, 허유(許由)는 요제에게 말하기를 “안 됩니다! 천자께서 위험합니다.” 라고 했다. 곧 설결(齧缺)은 위인 됨이 총명과 기지에 뛰어나고 그 반응이 민첩하며, 다른 사람에 비해 그 태어난 재능이 특출해서, 만일 요제께서 그의 인사상의 장점만 보고 그에게 선양한다면, 그는 타고난 그 재능으로 다스릴 것이니 그건 위험합니다. 안 됩니다. 라고 했다.
他明於禁止過失,卻不知過失產生的原因。讓他做天子,他就要崇尚智慧而拋棄天然;他就要以己意為標準去分別事物,就要像火燒火燎一樣地去求知;就要埋頭於事物之中,處處干涉事物,就要忙忙碌碌應接四方,想方設法滿足事物的要求;就要千方百計去改變萬物,弄得它們不能安寧。怎麼能夠讓他做天子呢?雖然他的行為可以為一般人所效法,但他僅能做個諸侯國的君主,而不可以做天子。治理,是產生動亂的由頭,是臣子的災難,是君主的禍害。”許由對他的老師是瞭解得很透徹的,經過許由的勸阻,堯也就自然沒說這回事了。
그는 잘못을 금지하는 데는 밝으나, 오히려 그 과실이 생기는 그 원인은 잘 모르는 사람일 테니까요. 만일 그를 천자를 시키면, 그는 곧 지혜(智慧)만을 숭상해서, 그 천연(天然)이라는 덕목을 버릴 것입니다. 이는 곧 자기의 뜻을 표준삼아 사물의 분별의 표준을 삼으려 할 것이며,이는 마치 불난듯 불에 덴 듯 지식을 구하려 함으로써 오는: 곧 머리를 사물에 깊이 묻고, 처처에 간섭하면서, 천지사방에 뛰어 다니며 바쁘기만 할 것입니다.사물의 요구에 만족한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바로 천만 방법을 찾아 만물을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곧 그 사물들이 편히 쉴 틈이 없을 정도로요. 그럼 어떻게 그를 천자로 할 수는 없겠는가? 설령 그의 행위가 일반인 수준이라면, 이는 겨우 일개 제후국 군주는 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천자가 되기에는 치리(治理)란 곧 생산 활동의 바탕이 되는 요체가 됩니다. 그가 천자가 된다면, 신하에게는 재난이며, 군주에게도 화근이 됩니다. “허유(許由)가 그의 스승에게 말 한 것은 참으로 명석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이 허유의 만류에 요제는 곧 이 언급을 그만 두었다.
帝堯訪賢,古籍中記載最多的首推訪許由的故事。許由,為當時的名士。他崇尚自然無為,不貪求名利富貴,堅持自食其力,生活簡樸,無求於世。他得知帝堯要來訪他,便躲走了。恰巧齧缺碰到他,問他要到哪里去?他說:“為逃避帝堯”。齧缺又問:“為什麼呢?”許由說:“堯這個人啊,轟轟烈烈實行仁義,我怕他要被天下人恥笑,後世會有人吃人的事發生。老百姓嗎,不難籠絡他們。愛護他們,他們就和你親近;給他們利益,他們就會為你所招徠;表揚他們,他們就會勤奮。作他們厭惡的事,他們就要逃散。愛護百姓,使百姓得利是出於仁義,那真誠實行仁義的事,借仁義取利的多。
요제가 현인을 찾은 고서중에 가장 많이 기록된 것들은 허유(許由)을 찾은 것이다. 허유(許由),이는 당시의 명사였다. 그는 자연무위를 숭상하고 명리를 좇지 않았다. 그리고 스스로 힘써 자립했으며 생활은 소박하며, 세상의 명리를 찾지 않았다. 요제가 그를 찾을 것을 알고는 그는 숨었다. 마침 설결이 허유를 마주치자 어디 가오? 물으니, 허유는 “요제 피해 도망가오 ” 라고 했다. 설결은 또 묻는다: 그런데 왜 도망가오? 이러자 허유는 이렇게 대답한다. “요제는 개인적으로는 인의를 실행한다고 법석이지만 나는 그가 천하 만민의 웃음을 살 것이 두렵소, 후세에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일이 필히 있을 것이요. 백성이란 서로 농락하기도 쉽지만, 그들을 사랑한다면, 그들은 곧 당신과 친근해 지고: 그들에게 이익을 준다면, 그들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모아 올 것이며, 그래서 그들을 칭찬한다면 또 그들은 바로 열심히 일할 것입니다. 그들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들은 곧 흩어져 도망칠 것입니다. 백성을 애호하면, 백성을 이롭게 함은 곧 인의(仁義)에서 나오는 것이어서, 진정으로 인의를 실행한다면, 이 인의가 가져오는 그 실리는 참으로 많습니다.
這樣仁義的行為,不僅不能真正實行,而且還會成為虛偽的工具。這種想用一個人的決斷來使天下獲利的事,不過是一刀切罷了。堯只知道賢人可以利天下,而不知賢人的害天下。只有那不重用賢人的人,才知道這個道理。”過了一段時間,帝堯去拜訪許由,朝拜許由於沛澤之中。
이러한 인의의 행위는 진정한 실행이 아닐 뿐만 아니라, 거짓의 도구가 될 뿐이다. 이러한 류의 생각이란 바로 개인의 결단만으로 천하의 이익을 취하려는 일이어서 한 칼에 실패할 뿐이다. 요제는 단지 현인을 아는 것만으로 천하를 얻을 수 있었으나 현인이 천하를 해하는 점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단지 그 현인을 쓰지 않음을 통해서 이제 겨우 이러한 도리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어느 시간이 지나자 요제는 이제 폐택(沛澤) 땅을 가서 허유(許由)를 뵙고 절한다. (註:沛澤은 지금 沛縣)
堯對許由說:“太陽出來了,火把還不熄滅,在光照宇宙的太陽光下要它放光,不是多餘的嗎?大雨下過了,還去澆園,不是徒勞嗎?作為天子,我很慚愧,占著帝位很不適宜,請允許我將天下囑託於先生,天下必然太平。
요제는 허유에게 말한다. “태양이 나왔는데도 불이 아직 꺼지자 않는다면, 빛이 비추는 우주의 태양광 아래에서도 아직 빛을 발하고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불필요한 일이 아닐까요? 큰 비는 이미 그쳤는데도 아직 정원에 물을 주고 있다면, 이건 쓸데없는 일 아닐까요? 천자(天子)가 되어, 나는 참 부끄럽소, 제위(帝位)가 나에게는 부적합하오, 선생님께서 좀 천하를 맡아 주신다면, 천하는 틀림없이 태평 하오리다.
”許由對帝堯說:“你治理天下,已經升平日久,既然天下已經治理好了,還要讓我代替你去作一個現成的天子,我為了名嗎?名,是實的從屬物,我對那個虛名不感興趣。鷦鷯即使在深林裏築巢,也不過占上一枝就夠了;鼴鼠就是跑到黃河裏去喝水,也不過喝滿肚子就足了。你就回去吧!天子於我沒有什麼用處。廚子就是不做供品,祭祀也不會去代替烹調的。”許由於是到箕山之下,潁水之陽,耕田而食,非常快活,終身不貪求帝位。傳說,堯以天下讓許由,許由以為恥辱不堪入耳,到河裏去洗耳朵,後有洗耳河之名。巢父牽牛去河裏飲水,碰見許由洗耳,問明原因之後,便說:“你洗了耳朵把這裏的水弄髒了,我不想讓我的牛喝這污水。”就牽著牛到河的上游去飲水。
허유는 제요에게 대답했다: 당신이 천하를 치리해서 이미 세상의 태평을 얻은 지 오래요. 이미 세상의 태평한 세상을 이루었는데 뭘 또 나에게 물려주어 다시 천자를 하게 하려 하시오, 나의 이름을 위해서? 이름?,이는 실로 하나의 종속물에 지나지 않아, 난 그런 쓸데없는 명성에는 관심이 없소. 굴뚝새는 설령 깊은 산속에 둥지를 틀고 지내지만, 겨우 나뭇가지 하나로 족하오. 두더지는 비록 황하강을 뛰어 건너 물을 마시지만, 이 또한 마셔서 배가 차면 족할 뿐인 것을! 곧 돌아가시오. 천자 난 그런 것 쓸데없소. 요리사가 제수를 만들지 않는데, 제사가 어찌 그 요리를 대신 할 수있겠소.“허유는 그래서 영하(潁河) 건너 북쪽에 있는 기산(箕山) 아래로 가고, 그곳에서 밭을 갈며 즐겁게 지냈으며, 종신토록 제위를 탐하지 아니했다. 전설에는 요제가 천하를 허유에게 선양한다고 할 때에 허유는 이를 치욕으로 여겨 참아 귀에 담을 수 없자, 강가에 가서 귀를 씻었다고 하는데, 후세에는 귀를 씻은 강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소부(巢父)가 소를 몰고 물가에 가서 물을 먹이려 할 때에 허유가 귀를 씻는 모습을 보게 되자, 말하기를 댁에서 이 물에다 귀를 씻으면 이 물이 더러워지고 나는 나의 소에게 이 더러워 진 물을 먹일 수 없게 되오. 했다고 한다.”곧 소를 끌고 그 강의 상류로 가서 물을 먹였다“
帝堯曾去拜訪一個名叫子州支父的人,請教過後覺得此人可以托天下,要以天下讓子州支父。子州支父答道:“將天下讓給我倒可以,只是不巧,我正患有幽憂之病,正準備好好治一治,不能夠接受。”帝堯也不好勉強,但十分敬重其為人。
요제가 자주지부(子州支父)라고 부르는 사람을 찾아가 절하고 가르침을 청한 후 이 사람은 가히 천하를 부탁할 인물이구나. 깨닫게 되자, 바로 子州支父에게 천하를 넘기려고 했다. 이때 子州支父는 대답해 말하기를 : “천하를 나에게 넘기려 함은 가능한 일이지만, 마침 공교롭게도 나는 지금 근심과 슬픔에 잠기는 병을 앓고 있소. 마침 고치려고 하는 참이어서 그 일을 맡을 수 없소,”했다. 요제는 이번에도 억지로 권할 수 없게 되자 이 분을 오직 공경할 뿐이었다.
堯當政後生活非常儉樸,住茅草屋,喝野菜湯,穿用葛藤織就的粗布衣。時刻注意傾聽百姓們的意見,在簡陋的宮門前設了一張“欲諫之鼓”,誰要是對他或國家提什麼意見或建議,隨時可以擊打這面鼓,堯聽到鼓聲, 立刻接見,認真聽取來人的意見。為方便民眾找到朝廷,他還讓人在交通要道設立“誹謗之木”,即埋上一根木柱, 木柱旁有人看守,民眾有意見,可以向看守人陳述,如來人願去朝廷,看守人會給予指引。由於能及時聽到民眾的意見,堯對百姓的疾苦就非常瞭解。
요제는 정무를 맡아 관리하면서 생활은 매우 검박했고, 뗏집(茅草屋)에 살면서, 야채즙을 마셨으며, 갈포로 짠 곧 조악한 옷을 입었다. 백성의 의견에 귀 기울이고 누추한 궁전문 앞에는 “신문고”를 세워 놨다. 만일 누가 그에게 또는 국가에게 낼 어떤 의견이나 건의가 있다면 수시로 이 북을 칠 수 있게 하고, 요제는 이 북소리를 듣고, 바로 접견하고, 열심히 그 의견을 들었다. 그리고 백성이 궁전에 편히 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는 또 교통요지에 “비난의 나무(誹謗之木)라는 것도 세울 수있게 해 주어 즉 바로 하나의 나무 기둥을 세울 수 있게 해주고, 그 나무 기둥 주위에 간수를 세워, 국민이 의견이 있으면, 그 간수 에게 진술토록 했고, 만일 그 오는 사람이 궁전을 가길 원하면, 그 간수가 그를 인도 할 수있도록 했다. 그래서 바로바로 국민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고, 요제는 백성의 고통을 바로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六、感靈淬精敬上蒼,造圍棋以教丹朱
六. 깊은 영감으로 하늘에 경배하며, 바둑을 만들어 아들 주단(丹朱)에게 가르치다.
傳說堯由龍所化,對靈氣特為敏感。受滴水潭靈氣所吸引,將大家帶至此地安居,並借此地靈氣發展農業,使得百姓安居樂業。為感謝上蒼,並祈福未來,堯會精選出最好的糧食,並用滴水潭水浸泡,用特殊手法去除所有雜質,淬取出精華合釀祈福之水,此水清澈純淨、清香幽長,以敬上蒼,並分發于百姓,共慶安康。
전설에는 요제는 용이 변화해서 된 사람이고, 그래서 그 영감이 매우 민감했다고 한다. 빗방울을 받아 영기를 흡입하고, 모두에게 그 땅에서 편히 살 수 있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로써 땅의 영기를 빌어 농업을 발전시키고, 백성이 곧 편히 살며 생업을 즐겁게 하게 했다고 한다. 하늘에 감사드리고, 앞날의 복을 구함으로써, 요제는 곧 가장 좋은 식량을 얻을 수 있었고, 빗물을 이용해 못물을 채우고, 특수한 방법으로 모든 잡되 것들을 없애서, 가장 좋은 수질의 복된 물을 취해 나갔으며, 그 깨끗한 물로 아주 순수하고 맑으며, 깊이 향기로운 물이 되어 하늘에 공경 드리고, 아울러 백성에게도 주어 함께 편히 살았다.
相傳,上古時期堯都於平陽,平息協和各部落方國以後,農耕生產和人民生活呈現出一派繁榮興旺的景象。但有一件事情卻讓帝堯很憂慮,長子丹朱雖長大成人,十幾歲了卻不務正業,遊手好閒,聚朋囂訟鬥狠,經常招惹禍端。帝堯心想:要使丹朱歸善,必先穩其性,娛其心,教他學會幾樣本領才行。起初是教習打獵本領,丹朱不喜,堯歎氣說:“你不願學打獵,就學行兵征戰的石子棋吧,石子棋學會了,用處也大著哩。”說著用箭頭在一塊平坡山石上用力刻畫了縱橫十幾道方格子,撿來一大堆山石子,又分給丹朱一半,手把著手地將自己在率領部落征戰過程中如何利用石子表示前進後退的作戰謀略傳授講解給丹朱。丹朱此時倒也聽得進去,顯得有了耐心。
전하기는, 옛날에 요제는 평양(平陽)에 도읍을 정하고, 각 부락의 지방 정부와 잘 지내자 그후,농경 생산과 인민 생활에 번영 흥왕의 새 물결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요제에게는 하나의 걱정이 있었으니 장자 주단이 성인으로 자랐으나 열 몇 살이 다되도록 이렇다 할 본업이 없이 빈둥거리면서, 항상 싸움질에 말썽만 일으켰다. 요제는 생각하기를: 주단을 착하게 만드는 길은 우선 그 심성을 안정되게 하여 주며,마음을 즐겁게 하여 주며,그가 재능을 키우도록 해주어야만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우선 사냥 하는 법을 가르치자 주단은 기뻐하지 않자, 요제는 탄식해서 말하기를 네가 사냥 배우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럼 전쟁놀이인 바둑을 배우라고 했으며이 바둑을 배우면, 용처가 많다. “화살을 이용해서 평파산 돌 위에서 힘껏 종횡 열 몇 개의 방을 만들면,곧 한 무더기 산의 돌들을 거두어 드릴 수 있단다.또 주단에게 반을 주고 나서, 손에 손을 잡고 자기가 어떻게 부락민들을 이끌면서, 출전하는 과정 중에 어떻게 돌을 이용해서 전진과 후퇴 작전 모략을 구사하는지를 주단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러자 주단은 이때 매우 열심히 배워 가며, 인내심을 나타냈다.
此後一段時日,丹朱學棋很專心,也不到外邊遊逛,散宜氏(帝堯正妃)心裡踏實些。帝堯對散宜氏說:“石子棋包含著很深的治理百姓、軍隊、山河的道理,丹朱如果真的回心轉意,明白了這些道理,接替我的帝位,是自然的事情啊。
그러자 한동안, 주단은 바둑 공부에 전념했고, 그러자 밖을 나도는 일도 없어지자. 요제의 정비(正妃)인 산의씨(散宜氏) 마음도 좀 놓였다. 요제는 본부인 산의씨에게 말하기를“바둑이 백성과 군대 그리고 산하(山河)를 다스리는데 정말 깊은 도리가 숨어 있단 말이야. 정말 주단이 회심해서 마음을 잡으면, 정말 이 도리가 명백한 샘이지. 그 럼 내 황제 자리를 물려 줘도 될터이니. 이게 자연의 도리인 것이지”라고 말했다.
孰料,丹朱棋還沒學深學透,卻聽信先前那幫人的壞話,覺得下棋太束縛人,一點自由也沒有,還得費腦子,再犯以前的老毛病,終日朋淫生非,甚至想用詭計奪取父帝的位置,散宜氏痛心異常,大病一場而逝。帝堯十分傷心,把丹朱遷送到南方,再也不想看到丹朱,還把帝位禪讓給虞舜。虞舜也學帝堯的樣子,用石子棋教子商均。以後的陶器上便產生圍棋方格的圖形,史書便有“堯造圍棋,以教丹朱”的記載。今龍祠鄉晉掌村西山便有棋盤嶺圍棋石刻圖形遺跡。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주단은 아직 바둑을 깊이 배우기도 전인데, 오히려 선배인 그 무리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바둑이란 사람을 속박하게 하고, 조금의 자유도 없게 될 뿐만 아니라 뇌까지도 소모가 많다고 생각하게 되자, 다시 전의 그 나쁜 병이 도지고 만다. 종일토록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심지어는 거짓을 이용해서 아버지의 황제 자리를 넘보게 되자, 산의씨(散宜氏)는 마음이 상하자 큰 병이 들고 나서 죽자, 요제도 이제 상심이 커서, 주단을 남방에 보내 버리고, 다시는 주단을 보지 않기로 하며, 황제 자리는 오히려 우순(虞舜:舜帝)에게 넘겨 준다. 순제(舜帝)도 요제(帝堯)의 모습을 그대로 배우며, 바둑을 이용한 아들 상균(商均) 교육에 나선다. 그 후에 도자기로 만든 네모난 바둑판도 나온다. 역사 기록에는 요제가 바둑을 만들고, 주단을 가르쳤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 용사향(龍祠鄉) 진장촌(晉掌村) 서산에 가면 기반령(棋盤嶺)에 돌에 새긴 바둑판 유적이 있다.
關於圍棋還有另一記載,是在帝堯巡守中,順路找許由,欲禪讓之,不果。後在赤將子輿的建議下,取道黟山(黃山早期名字),拜謁軒轅黃帝祖考白日飛升之地。在黃山登頂的路上,到了軒轅黃帝祖考當年弈棋在仙棋石處的遺跡,容成子和浮丘子是棋友.
또 바둑에 관해서는 하나의 다른 기록도 있는데 제요(帝堯)가 여러 나라를 순행 중에 허유(許由)를 찾게 된다. 그에게 황제 자리를 선양코자 했으나 실패한다. 후에 적장자여(赤將子輿)의 건의를 받고, 지금 황산(黃山)의 본 이름이었던 이산(黟山)을 거쳐 가게 되는데, 이때 헌원황제(軒轅黃帝) 조상 백일이 승천한 땅에 예를 올리게 된다. 황산 정상의 길에서, 헌원 황제 조상이 그때 바둑을 두었다는 선기석(仙棋石) 유적지에 다다른다. 이곳에는 용성자(容成子)와 부구자(浮丘子)는 바둑 친구라고 되어 있다.
上古秘史有書雲: 大眾直向軒轅峰而來。一路鳥道崇岡,非常難走。
走到一個峰上,只見一塊方石,上面縱橫刻有數十道深線,都成方罫形;旁邊又置有數百顆圓形的小石子,不知何用。
상고비사(上古秘史)란 책에 이르기를: 한 무리가 헌원봉(軒轅峰)을 향해 왔다. 길이 험했고, 매우 걷기 힘들었다. 한 봉우리에 다다르자, 네모난 돌 하나가 보였고, 그 돌 위에는 열 개의 깊은 선이 종횡으로 그어져 있었는데 모두 바둑판 모습의 선 들이었다. 옆에는 또 수백 개의 원형 작은 돌들이 있었으나 용처는 모르겠더라.
赤將子輿道:“這個亦是黃帝的遺物。從前黃帝和容成、浮丘諸人,常常拿了這個東西來遣興。兩人對坐了,一個用白石子,一個用黑石子,在這方罫之上你放一顆,我放一顆,差不多放到一半光景,只聽他們說你贏了幾路了,或者說你輸了幾路了。這個玩意兒名字叫作奕棋,大約是可以分勝負的。”帝堯道:“先生可懂嗎?”赤將子輿道:“當初,野人在旁亦嘗細細觀察,看見黑子怎樣去圍住那個白子,白子又怎樣去包住那個黑子,覺得亦很有道理。但是那道理非常深細,野人粗心浮氣,實在有點不耐煩去研究它,所以不懂。
적장자여(赤將子輿)가 말하기를: 이것 역시 황제의 유물이다. 종전에 황제와 용성 그리고 부구 이 모든 이들이 늘 손에 이것을 들고 재미있게 놀았다. 둘이 마주 앉아서,하나는 흰 돌을 하나는 검은 돌을 가지고, 이 바둑판에서 네가 한수, 내가 한수, 거의 반을 두고는 바로 네가 몇 수쯤 이겼다. 라는 소리를 듣곤 했다. 이 놀이가 바로 바둑이다. 대개 승부 게임이다. 요제가 말했다. “어떻게 아시겠습니까?”적장자여(赤將子輿)가 말했다.“당초에 내가 옆에서 그저 검은 돌이 어떻게 흰 돌을 포위해 들어가는지를 또 흰 돌이 다시 어떻게 검은 돌을 에워싸 가는지를 보면서 참 대단한 이치가 있음을 알게 되었소, 그러나 그 이치가 매우 심오해서, 시골 사람인 내가 부족하여, 배워 내기가 쉽지 않아 잘 모르겠소, 라고 했다.
”帝堯聽了,將所布在那裡的石子行列,細細觀看,揣摩了良久,又將石子統統移開,自己再一顆黑、一顆白的擺起來。赤將子輿在旁看了說道:“原來帝是懂這個玩意兒的。”帝堯道:“朕不過研究研究,並沒有懂。”赤將子輿道:“野人不相信。既然沒有懂,為什麼這個擺的方式,有點和當初黃帝他們相像呢?”
“요제가 듣고 나서자 저기 늘어놓은 돌들의 모습을 잘 보고, 한동안 여러모로 탐구해 보시오, 그리고 또 돌들을 몽땅 치운 후, 다시 흰 것 하나, 검은 돌 하나 이렇게 놓아 보시오, 적장자여(赤將子輿)가 옆에서 보고 나서 말하기를: ”원래 황제께서는 이 놀이를 아시기 때문이지요.“요제는 말하기를”나도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을 따름이요. 원래는 아무것도 몰랐다오 “적장자여가 말했다:”저는 믿지 못하겠습니다. 원래 모르셨다면 어떻게 저 돌 놓는 방식, 당초 황제 그들의 방식과 같을까요.
原來帝堯是天縱之聖,敏悟異常,一經思索,已覺得有點頭緒,而且知道此事是極有趣的,因而將石子一齊移開,又細細擺了一會。
원래 요제는 타고난 성군이어서, 변화의 감지에 민감하고, 사색을 통해서, 바로 그 실마리를 찾아내고, 또 그것에 즐거움도 느꼈다. 그래서 돌들을 가지런히 늘어놓고, 또 세세하게 다시 한 번 놓아 보곤 했다.
七、察舜之德以禪位,駕崩真身葬谷林
七 .순(舜)의 덕을 살펴 보고나서 황제의 자리를 선양한 후, 죽어 곡림에 묻히다.
堯最為人們稱道的是他不傳子而傳賢,禪位於舜,不以天子之位為私有。堯在位70年,感覺到有必要選擇繼任者。他早就認為自己的兒子丹朱凶頑不可用,因此與四嶽商議,請他們推薦人選。四嶽推薦了舜,說這個人很有孝行,家庭關係處理得十分妥善,並且能感化家人,使他們改惡從善。堯決定先考察一番,然後再行決定。
요제가 가장 칭송받는 일은 그가 황제 자리를 아들이나 현인에게 넘겨주지 않고, 순제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요제가 재위 70년에, 후임자를 고를 필요를 느꼈다. 그는 이미 자기의 아들 주단이 인물이 완고해서 적임이 아님을 알았다. 그래서 아내 부모 백숙과 상의 후, 그들에게 사람을 추천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때 이들은 순(舜)을 추천했고, 말하기를 이는 매우 효심이 깊고, 가정관계가 원만하고, 또 사람들과 친화력도 좋아, 그들을 감화시키기도 했다. 요제는 우선 한번 살펴 보고나서 이제 결심한다.
堯把自己的兩個女兒娥皇、女英嫁給大舜,從兩個女兒那裡考察他的德行,看他是否能理好家政。舜和娥皇、女英住在溈水河邊,依禮而行事,二女都對舜十分傾心,恪守婦道。堯又派舜負責推行德教,舜便教導臣民以“五典”——即父義、母慈、兄友,弟恭、子孝這五種美德指導自己的行為,臣民都樂意聽從他的教誨,普遍依照“五典”行事。堯又讓舜總管百官,處理政務,百官都服從舜的指揮,百事振興,無一荒廢,並且顯得特別井井有條,毫不紊亂。堯還讓舜在明堂的四門,負責接待四方前來朝見的諸侯。舜和諸侯們相處很好,也使諸侯們都和睦友好。遠方來的諸侯賓客,都很敬重他。最後,堯讓舜獨自去山麓的森林中,經受大自然的考驗。舜在暴風雷雨中,能不迷失方向,依然行路,顯示出很強的生活能力。
요제는 자기의 두 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을 순(舜)에게 시집보내, 그 두 딸을 통해서 순(舜)의 덕행을 살핀 보고를 받는다. 가정을 잘 다스릴 인물인지를 본다. 순(舜)과 아황, 여영은 위수(溈水)강변에 살았는데, 예의에 따라서 일을 처리했고, 두 딸들도 모두 순을 마음에 들어 했고, 부도(婦道)를 엄격히 지켰다. 요제는 또 순(舜)에게 도덕 교육을 담당토록 했는데, 순은 바로 백성과 신하들에게 오전(五典) 즉 아버지 도리, 어머니 인자함, 형의 도리, 아우의 도리, 자녀의 효도 이 다섯 종류의 미덕을 지도해 나가면서, 자신의 행위로 삼는다. 백성과 신하들은 모두 그의 가르침을 듣고 따르면서, 늘 이 오전(五典)을 따라 살게 된다. 요제는 순에게 모든 관리를 다스리게 하고, 정무(政務)도 넘겨주어, 모든 관리들로 하여금 순(舜)의 지휘를 받게 하자, 모든 일들이 잘 되어 나갔으며, 잘못되는 일이 없었고, 아주 조리정연해서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리고 또 요제는 순에게 명당(明堂)의 사문(四門)을 넘겨주면서, 사방에서 조정에 오는 제후(諸侯)들을 접견토록 한다. 순제는 제후들과 아주 잘 지냈으며, 또 제후들이 상호 화목하게 지내도록 했다. 멀리서 오는 제후 빈객들도 모두 순제를 공경했다. 그래서 요제는 순과 단 둘이서 산속에 들어가서 대자연의 교훈을 몸소 체득한다. 순제는 폭풍우 속에서 길을 잃고, 의연하게 길을 찾아내고 이렇게 강인한 생활능력을 익혀 낸다.
經過三年各種各樣的考察,堯覺得舜這個人無論說話辦事,都很成熟可靠,而且能夠建樹業績,於是決定將帝位禪讓於舜。他於正月上日(初一),在太廟舉行禪位典禮,正式讓舜接替自己,登上天子之位。堯退居避位,二十八年後去世,“百姓悲哀,如喪父母.三年,四方莫舉樂,以思堯”,人們對他的懷念之情其為深摯。
이렇게 삼년의 기간을 통해 각양각색의 살핌을 거친 후, 요제는 순이란 인물은 말없이 일을 하고, 참으로 인격이 성숙해서 믿을 수 있으며, 능히 업적을 수립할 수 있다고 생각되자, 결국 제위(帝位)를 순에게 선양(禪讓)키로 한다. 요제는 정월달 초하루에, 태묘(太廟)에서 제위의 선양 의식을 갖고, 정식으로 순에게 자기를 대신해서 천자의 자리에 오르게 하다. 요제는 이제 물러나 자리를 내어 준 후 이십 팔세에 죽는다. “백성은 슬퍼하며, 부모상을 당한 듯, 삼년동안 각지에서 가무(歌舞)를 삼갔으며, 모든 이들은 요제를 깊이깊이 잊지 못했다.
“堯王虛葬八百墓,唯有真身在谷林”。堯王墓,是帝堯的陵寢,因葬于鄄城谷林,又稱谷林堯陵。谷林堯陵,曾隨鄄城的歷史沿革先後隸屬于濟陰郡成陽、濮州雷澤,今屬鄄城縣,位於今山東菏澤市鄄城縣城南7公里處富春鄉趙仟莊前。谷林堯陵雖經數千年滄桑風雨,但墓塚猶在,碑謁尚存。
“요왕(堯王) 허묘는 팔백 개나 되지만, 단지 실묘(實墓)는 곡림(谷林)에 있다. 요왕 묘는 요제(帝堯)의 무덤을 말하고, 견성(鄄城) 곡림(谷林)에 장사지냈기 때문에 곡림 요릉(堯陵)이라 부른다. 곡림요릉(谷林堯陵)은 지난 날 견성(鄄城)의 역사 변천에 따라 제음군(濟陰郡) 성양(成陽)이 되기도 하고, 복주(濮州) 뇌택(雷澤)이 되기도 했다가 지금은 견성현(鄄城縣)에 속해서, 지금 산동성 허저시(菏澤市) 견성현 성남(城南) 7KM 쯤에 있는 부춘향(富春鄉) 조천장(趙仟莊) 앞에 있다. 곡림 요릉은 비록 천년의 세월변화를 거쳤다고 하지만 아직 묘가 남아 있고, 비갈(碑謁)도 있다.
“
關於堯葬谷林,史書上多有記載。
秦朝呂不韋《呂氏春秋•節哀》篇:“堯葬于谷林,通樹之。”
魏晉時期皇甫謐所著《帝王世紀》載:“堯葬濟陰成陽西北四十裡,是為谷林。”
晉《地理志》成陽條下載:“雷澤,舜所漁,堯塚在西。”
《通鑒輯覽》載:“堯即位百載,崩于成陽,葬谷林。”
《宋史•禮言》載,北宋熙甯元年(1068)濮州知州韓鐸言:“堯陵在本州雷澤縣東谷林山。”
곡림에 요제를 장사지낸 것에 관해서는, 사서(史書)를 보면 많이 나온다. 진(秦) 나라 때 여불위(呂不韋) 여씨춘추. 절애<呂氏春秋•節哀>편에는:“요제는 곡림에 장사 지내고,그곳에 온통 나무를 심었다.”라고 되어 있다. 위진(魏晉)때에 황보밀(皇甫謐)이 쓴 책 제왕세기(帝王世紀)를 보면,:“요제는 제음군(濟陰郡) 성양(成陽) 서북쪽 사십리에 장사하고, 숲을 만들었다.”라고 나온다. 진(晉)의 지리지<地理志>라는 책에서 성양(成陽) 편을 찾아 읽으면,:“뇌택은 순(舜)이 고기 잡던 곳이며, 요제의 묘는 그 서쪽에 있다”라고 나온다. 통감집람<通鑒輯覽>에는 :“요제는 백제에서 즉위하고, 죽어서 성양(成陽)에서 죽고, 곡림에 장사지냈다. 라고 나온다. 송사.예언<宋史•禮言>에는 북송 희녕 원년 (1068년) 복주 지사 한택(韓鐸)이 말하기를 ”요제의 능은 본주 뇌택현 동쪽 곡림산에 있다고 나온다.
明《濮州志》載,谷林山,“在州治南40裡,有高阜見存,元學士吳律構富春園於其下。”故後世亦稱谷林山為富春山,富春園衍化為富春村名,延續到現代。
명나라 복주지(濮州志)에는 곡림산,“주(州) 관내에서 남쪽으로 사십리쯤에 있고, 높은 언덕이 있고, 원나라 학사 오진(吳律)이 지은 부춘원이 그 아래 있다 라고 나온다.”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곡림산이 곧 부춘산이라고 하며, 부춘원에 연관해서 마을 이름도 부춘촌이 되었고, 지금에 이른다.
《清史稿》載:“濮州東南谷林,古雷澤也。乾隆元年,修葺厘正,定谷林堯陵為舊址。”
《大清一統志》“唐堯陵”條載:“陵高四丈五尺,廣二十八丈。”據清《濮州志》“堯陵古圖”所示:堯陵為坐北朝南三進式長方形陵園,山門前立有“石門”牌坊,四周圍磚牆。進門內兩側有東西更衣亭。二進院門為一正兩偏,門內左右是東西偏廂房,其後建有“享殿”。殿后是第三進院,古松柏掩映下,陵墓巍然屹立。
청사고<清史稿>에는: “복주(濮州) 동남 곡림은 예날 뇌택(雷澤)이라고 나온다. 건륭 원년, 개축한 후 곡림 요릉을 옛터로 해놓았다.
八、晚年封子誕育地,劉姓之源始唐地
八 .만년에 아들을 봉하고, 낳아 기른 곳 이며, 유성(劉姓)의 근원 원시 당나라 땅이다
帝堯禪位於舜之後,過著幸福的晚年生活,但對母親慶都之情念念難忘。
堯帝之母慶都的出生地是菰邑,據史料記載,堯母陳鋒氏慶都居於菰邑都山,堯帝常登堯山南望都山,並以母親之名慶都命名都山一帶為慶都邑,及後來禪位於舜,思母更甚,於是請封第九子源明於菰邑,以高揚的巨斧為圖騰,是為劉國也。
제요가 순에게 선양한 후, 행복한 만년을 보냈으나, 단지 어머니 경도(慶都)에 대한 그리움은 잊을 수가 없었다. 요제의 어머니 경도의 출생지는 고읍(菰邑)이며, 사료에 의하면 요제의 어머니 진봉씨 경도는 고읍 도산(都山)에 살았으며, 요제는 늘 요산(堯山)에 올라 남쪽으로 도산(都山)을 바라 봤다고 하며, 어머니 이름 경도를 가지고 도산 일대를 경도읍(慶都邑)이라고 지었다고 되어 있으며,후에 순(舜)에게 선위(禪位)하고,더욱 어머니를 그리워하면서, 요제는 아홉째 아들인 원명(源明)을 고읍(菰邑)에 봉하고,큰 도끼를 높이 든 모양을 바로 도등(圖騰)으로 했는데,바로 유국(劉國)이 된다.
《姓典》載:“劉,帝堯陶唐之後,受封于劉(國),其地在今定州唐縣是也。”
三民書局《大辭典》480頁對“劉”的解釋:“劉,地名”,帝堯陶唐氏後裔的封地,在今河北唐縣。
성전<姓典>에 보면,:“ 劉,요제 도당의 후예,유(劉)라는 나라에 수봉 받았는데 그 땅는 지금 정주(定州) 당현(唐縣)이다 라고 되어 있다. 삼민서국 대사전<大辭典> 제 480페이지에는 ”劉“의 해석에 관하여,”劉는 지명이다“라고 되어 있고, 제요 도당씨 후예의 봉지로써 지금 하북성 당현(唐縣)이다 라고 되어 있다.
宋代大史學家鄭樵的《通志•氏族略以邑為姓》劉條也說:“帝堯陶唐之後封于劉,其地今定州唐縣也”。 《中華姓氏通史》劉姓卷卷首語說:劉姓最古老的發源地,在今河北唐縣,這裡是遠古洪荒時代高揚巨斧、以劉為圖騰勇敢征服自然的古老劉姓子孫生活棲息的地方。
송대 대 사학자인 정초(鄭樵)가 쓴 통지.씨족략이읍위성<通志•氏族略以邑為姓> 유조(劉條) 편에 보면,: “제요 도당의 후손을 유(劉) 땅에 봉했는데 그 땅은 지금 정주(定州) 당현(唐縣)이라 라고 나온다. 중화성씨통사<中華姓氏通史> 유성(劉姓)에 관한 책의 첫머리에 보면 :유성(劉姓)이 가장 처음 발생한 곳은, 지금의 하북성 당현(唐縣)이고, 이곳은 옛날 홍황시대(洪荒時代) 큰 도끼를 높이 들고,劉 자(字) 문양의 도등(圖騰)을 들고 용감히 자연을 정복했던 옛날 유성(劉姓) 자손이 생활하며 살았던 곳이다. 라고 나온다.
據現有各種資料證明,劉氏最原始的發源地、最古老的劉地,在今河北唐縣。
據當今一些學者考證,劉邑所在地唐縣一帶,原為帝堯母族伊祁氏的居地,也是唐堯的早期封地。後來唐堯隨父親(帝嚳)南下入居中原,繼而做了華夏部落聯盟首領。及虞舜繼位,晚年的堯請封故地劉邑。這就是後世傳聞“舜封堯裔于劉邑”之說的由來。
오늘날 각종 자료가 증명하는 바에 따르면, 劉氏의 가장 원시 발원지는 아주 오래된 유의 땅 즉 劉地로써 지금의 하북성 당현(唐縣)이다. 현대의 한 학자의 고증에 의하면, 유읍(劉邑)소재지 당현 일대은 원래 제요의 모계인 이기씨(伊祁氏)가 살던 곳이며, 이곳은 옛 당나라의 처음 봉토였다. 라고 한다. 후에 옛 당나라 요제의 부친 제곡(帝嚳)이 남하해서 중원(中原) 땅에 들어가, 그곳에서 화하부락(華夏部落) 연맹 수령이 된다. 그리고 우순(虞舜)이 자리를 이어 받고,만년의 요제는 옛땅 유읍(劉邑)에 봉하기를 청한다. 곧 다음과 같이 전해온다, “순은 요제의 후예를 유읍(劉邑)에 봉했다”라는 전설이 있다.
如今,河北省唐縣一帶有關帝堯及堯母慶都的傳說甚多,由於年代久遠,劉邑的確切遺址雖然早己無跡可尋,而今唐縣城東北10裡的北高昌村就是劉邑(劉國)遺址。
오늘날, 하북성 당현 일대는 제요 및 요의 어머니 경도의 전설이 아주 많으며, 그 연대가 오래되어 유읍(劉邑)의 정확한 옛터 자리는 비록 이미 없어졌지만 그래도 찾을 수 있고,지금 당현성 동북 십리의 북쪽 고창촌(高昌村)이 바로 유읍( 劉邑,劉國) 옛 자리이다.
北高昌村座落在唐堯西遷的出發地濁鹿山下,距慶都山1公里,在今河北省唐縣城東北10裡處。古時因近孤山而名孤邑,相傳帝嚳之妻,堯母慶都曾居住於此,春秋戰國時為趙國慶都邑。西漢置望都縣,這裡是望都縣第一治所(李唐時始遷今址),五代時稱望都故城,以後稱高昌城,明朝設高昌行署,清前後稱高昌社、高昌村,分村後稱北高昌村,清光緒維新時升置高昌鎮,民國34年(1945年)抗日戰爭勝利後複稱北高昌村。
북 고창촌(高昌村)은 옛당의 요제가 서쪽으로 출발한 출발지 탁록산(濁鹿山) 아래, 경도산에서 1킬로이고, 지금 하북성 당현성 동북 10킬로에 있다. 옛날에 고산이 가까워서 이곳 이름이 고읍이 되었으며, 전하기로는 제곡의 처, 즉 요제의 어머니 경도가 전에 이곳에서 살았다고 하며, 춘추전국 때에 조국(趙國)의 경도읍(慶都邑)이었다고 한다. 서한(西漢)은 왕도현(望都縣)을 설치하는데 이곳은 바로 왕도현의 첫 번째 치소(治所)였다. (이씨 황조 시대인 당나라 때에 지금의 이 터로 옮겨 왔다).오대(五代) 때는 망도고성(望都故城)이라 했고, 이후에 고창성(高昌城)이라 했으며, 명나라 때에 오면, 고창행서(高昌行署)를 두며, 청나라 전후에는 고창사(高昌社),고창촌 이라고 불렀고, 이 촌(村)을 분촌(分村)한 후에 북고창촌(北高昌村)이라 부르고, 청나라 광서(光緒) 유신 때에 고창진(高昌鎮)으로 승격시키고, 민국(民國) 34년(1945년)에 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다시 고창촌 이라고 부른다.
北高昌村原有舊城遺址(上世紀四五十年代尚未毀壞,至今村裡的一些老人仍記憶猶新,每個門洞的具體位置隨手可指),當地人稱‘九門九關’,即有九個門洞的舊城,據當地傳說乃劉邑故城。(舊城內地下水都是苦水,一牆之隔的城牆外就是甜水,現在俯瞰仍輪廓明顯,城內不長楊樹柳樹等樹種,只有一些槐、榆等樹種)。
북고창촌에는 원래 옛 성의 터(지난 세기 사오십년대에도 아직 훼손되지 않았고, 지금 마을의 어떤 노인들은 아직도 여전히 기억이 생생하며, 통로 문마다 구체적인 위치를 그때마다 손으로 가리킬 수가 있었다),그곳 사람들은 “아홉 관문(九門九關)”이라고 했으며, 즉 아홉 개의 동굴 문이 있었던 옛 성을 말하며, 그곳 지방의 전설과 유읍(劉邑) 고성(故城)의 전설에서 전해 온다.(옛 성의 지하수는 모두 물맛이 쓰고, 그런데 벽하나 지나면 그곳 물은 달며, 지금은 내려다 보면, 여전히 윤곽이 선명하고, 성내에는 지금은 백양나무도 버드나무도 없고, 오직 회화나무나 느릅나무가 좀 있다)
《淮南子》記載:“堯立孝慈仁愛,……人之言君天下者,瓊台九累,而堯白屋;解九種,而堯大布;宮中三市,而堯鶉居;珍饈百種,而堯糲飯菜粥;麒麟青龍,而堯素車玄駒。……”《尚書•堯典》說:(堯)允恭克讓,光被四表,格於上下 ……九族既睦,平章百姓。百姓昭明,協和萬邦。唐堯又分天下為九州:冀州、兗州、青州、徐州、揚州、荊州、豫州、雍州、梁州,各置州牧,總理州內各氏族。 據劉氏相關老譜載,帝堯晚年封第九個兒子源明于劉邑,是為劉姓之始也,故源明公是劉姓始祖。
<회남자(淮南子)에 나온다. “요제는 효성스럽고 자애로웠다고,.....사람들은 천하를 다스리려는 자가, 옥으로 장식한 누대(樓臺)가 아홉이라고 하는데, 요제는 흰 띠 풀집이었고, 옷이 아홉 가지나 있었다고 하지만, 요제의 옷은 거친 베옷이었고, 궁중에는 시장이 셋이나 된다고 했지만 요제는 제대로 된 집조차 없었고,:진수성찬이었다고 하나, 요제는 거친 밥에 야채 죽을 먹었다. 호화로운 마차를 탔다고 하나, 요제는 작은 말이 모는 검소한 차를 탔다.....”상서. 요전(尚書•堯典)에는: 요(堯)는 공평하며 공손했으며, 자신을 억제하고 양보심이 많았으며, 그 빛이 세상에 미치고, 하늘과 땅에 이르렀다.....큰 덕을 잘 밝히며, 구족(九族)이 친했다. 그래서 백성이 편히 다스려졌다 .백성이 밝아지고, 만방이 화합했다. 당의 요제는 또 천하를 아홉 주로 나눈다.:기주(冀州),연주(兗州),청주(青州),서주(徐州),양주(揚州),형주(荊州),옹주(雍州),양주(梁州),그리고 각 주에는 목(牧)을 두고, 각 고을의 씨족들을 다스리게 했다. 유씨(劉氏) 관련 옛 문집에 보면, 요제는 만년에 아홉째 아들 원명(源明)을 유읍(劉邑)에 봉했는데, 곧 유성(劉姓)의 시초가 되고, 이는 곧 원명공(源明公)이 유성(劉姓)의 시조(始祖)가 되는 계기가 된다.
后世纪念地:
후세기념지:
1、菏泽尧陵
1,허저 요제능
《水经注》:“雷泽东南十余里成阳城西二里有尧陵,陵南一里为尧母庆都陵”。
《古今图书集成》:“尧陵在旧雷泽城西,陵高四丈五尺,广二十丈,陵上有庙,俗谓之尧王寺是也。”
수경주<水经注>: “뇌택 동남 십리 성양성(成陽城) 서 2리쯤에는 요제릉이 있는데, 능의 1리쯤에는 요제의 어머니 경도(庆都)의 능도 있다.”<고금도서집성(古今图书集成): “요릉은 옛 뇌택(雷澤) 성의 서쪽에 있고, 능의 높이는 사장(四丈) 오척(五尺)이며,넓이는 이십장(二十丈),능에는 사당이 있고, 이를 민간에서는 요왕사(堯王寺)라고 했다.
《大清一统志》:“唐尧陵在菏泽县东北五十里,旧雷泽城西,与濮州接界。”
《皇览辑本》:“尧冢在济阴城阳。[史记集解同上]” 2006年,菏泽尧王寺村村民王克春在尧陵遗址发现《水经注》所载尧妃中山夫人残碑首,更有力佐证《汉书》尧冢在此之说。
2008年山东省文物局于尧王寺发掘,发现面积四万平方米、文化堆积厚十二米与尧同时期的龙山文化遗址,并于陵东二里发掘出成阳故城,是为尧王寺乃榖林尧陵遗址之铁证。
대청일통지(大清一统志) “당의 요제릉은 하택현(菏澤縣)의 동북방 오십 리에 있고, 옛 뇌택성 서쪽인데, 복주(濮州)와는 경계가 닿아 있다”라고 되어 있다. 황람집본(皇覽辑本): “요제의 무덤은 제음성(濟陰城) 북쪽에 있다. 사기집해동상<史記集解同上>” 2006년도, 허저(菏澤) 요왕사촌(尧王寺村)의 촌민 왕극춘(王克春)이 요릉의 옛 터에서 수경주(水经注)를 발견했는데, 적혀 있는 바에 의하면, 요제의 중산부인(中山夫人)의 남겨진 묘비(墓碑) 머리에서, 유력한 증거가 나온다. 한서(漢書)에는 요제의 무덤은 이곳이다. 라고 쓰여 있다.2008년 산동성문물국이 요왕사(尧王寺)를 발굴할 때,그 면적이 4만 평방미터,文化堆积(고대 인류 생활 흔적)의 두께가 12미터였고,요제 당시의 용산문화(龍山文化) 터였음을 알게 되었고, 아울러 이것은 능 동쪽 이리(二里)에서 발굴된 성양고성(成阳故城)이 요왕사(尧王寺) 및 곡림 요릉터이었음이 확실히 증명되었다.
2、临汾尧陵
2.임분 요릉
据史书记载,帝尧出生于古唐国,是上古时期部落联盟首领。尧帝建都平阳(山西临汾),因而临汾城南有尧庙,城东筑有尧帝陵。陵前筑有祠宇, 相传为唐初所建。明成化、嘉靖,清雍正、乾隆间,都曾重修。陵前祠内立有元代以来碑碣十余座,记述陵宇沿革和帝尧功绩。其中明嘉靖十八年(1539年)尧陵碑上刻有尧陵全图,保存完好。
사서(史书)를 보면, 요제는 옛 당나라에서 태어나고, 상고시기에 부락연맹 수령이었다고 나온다. 요제가 평양(平阳) 산서성(山西省) 임분(臨汾)에 도읍을 정함으로써, 임분성 남쪽에는 요제의 사당이 있으며, 성 동쪽에 요제릉이 있다. 능 앞에는 사당과 관리사가 있고, 이 건물들은 당나라 초기에 세웠다고 한다. 명나라 성화(成化) 때와, 가정(嘉靖) 때, 그리고 청나라 옹정(雍正) 때, 건륭(乾隆) 때에 각기 중수(重修)한 적이 있다. 능 앞의 사우(祠宇)에는 원대(元代) 이래의 비갈(碑碣)이 십여개나 세워 있다. 그리고 그곳에는 그 능의 사당에 대한 내력과 요제의 공적이 적혀 있다. 그중에서 명나라 가정(嘉靖) 십팔년(1539년) 요제릉 비석 위에 요릉 전도(全图)를 새겨 놓았는데,지금도 그 보존상태가 좋다.
3、临汾尧庙
3、 임분요묘
尧庙位于临汾市秦蜀路南端,为山西省重点文物保护单位。
尧庙原建于汾河西岸,晋元康中徙汾东,唐显庆三年(685年)迁到现址,距今已1300余年。历代均为国家级祭祀之所,清代以前每年的4月28日在此举行祭尧仪式并逢庙会,康熙帝巡幸尧庙时,定为皇会,届时全国各省、各族及海外炎黄子孙纷纷前来谒祭,庙会之盛为华北之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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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요제 사당은 임분시 진촉로(秦蜀路) 남단에 있는데, 산서성 중점문물보호(山西省重点文物保护单位)로 관리되고 있다. 요제릉의 사당은 원래는 분하(汾河) 서쪽 언덕에 세웠었지만, 진(晋) 원강(元康)때에 분하(汾河)의 동편으로 옮겼으며, 당나라 현경(顯慶) 삼년(685년)에 현재위치로 오게 되어,지금에 이르며 1300여년이 흘렀다. 역대 공히 국가급 제사의 장소였으며, 청나라 때 이전에는 매년 4월 28일 이곳에서 요제의 제사 의식을 갖고, 또 봉묘회(逢廟會:사당 건물 주변에서 만나 놀거나 시장을 열는 일)도 가졌고, 강희제(康熙帝)가 사당을 순회할때면, 황제의 주관 모임을 정하며, 그때는 전국 각성과 각 씨족 및 해외의 염화자손(炎黄子孙)이 모여들어 황제를 뵙고 또 제사에 참석했으며, 그 묘회(庙会)는 화북지방에서 제일 큰 규모였다.
相传陶尧建都平阳(临汾),有功于民,后人为祭祀尧王所建。
始建于晋,历经重修,现存为清代遗物。规模雄伟,布局疏朗,前有山门,碑列两侧,内有五凤楼,尧井亭、广运殿、寝宫等。
도요(陶尧) 평양(平陽) 임분(臨汾)에 도읍을 정했고, 백성에 공이 컸으므로, 후인은 요왕을 제사하기 위해서 사당을 세웠다고 전한다. 이 사당은 진(晋) 때에 처음 세워진 후,세월이 지나면서 중수(重修)해 오다가, 지금 것은 청대 유물인 것이다. 규모는 웅장하고, 모습은 산뜻하며, 앞에는 산문(山門)이 있고, 비석은 양측에 나란히 서있으며, 안에는 오봉루(五鳳樓),요정정(堯井亭),광운전(廣運殿) 그리고 침궁(寢宮)이 있다.
尧王与四大臣宰被喻为五凤。 “一凤升天,四凤共鸣”,五凤楼因此得名。尧井传为尧王所掘, 为记其功,上筑井亭一座。广运殿面宽九间,进深六间,重檐歇山顶, 高达27米,形制宏伟壮丽,殿周有廊环峙,柱础雕刻精,殿内金柱肥硕,直通上层檐下,雄健的础石上雕云龙盘绕,蜿蜒自如。 龛内塑有尧王像及侍者。庙内存有碑十余通, 载陶尧功绩及庙宇建造经过。庙南3公里存有“茅茨土阶”石刻。
요왕과 사대 대신들을 가르켜 오봉(五鳳)이라고 했다. “봉 하나가 승천하면, 봉 넷은 같이 운다.” 오봉루란 그래서 지은 이름이다. 요정(堯井)은 요왕이 팠다고 하며, 공을 기리기 위한 우물 정자 하나가 위에 서 있다. 광운전(广运殿)은 앞 넓이가 아홉 칸이나 되고, 그 깊이는 여섯 칸이며, 웅장한 초석위에는 구름과 용이 휘감은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구불구불 자유롭다. 감실 내에는 요왕과 시종의 모습을 빚어 놓았다. 묘내(庙内)에는 비석 십여개가 서 있고,도요(陶尧)의 공적과 사당의 건조내력이 쓰여 있다. 사당의 3킬로 쯤에 모자토계(茅茨土階:검소한 거처)라고 돌에 새긴 글이 있다.
4、顺平伊祁山
4.순평 이기산
尧帝出生地多有争议,一说尧帝出生于今顺平县的伊祁山,古人以出生地为姓,故尧帝姓伊祁。伊祁山也因此被称为尧山。早在汉平帝文始五年(公元5年),王莽就曾将曲逆改为顺平县。县境内伊祁山、尧母洞、尧帝太子丹朱城犹存,伊祁山太子庵香火不断。
요제의 출생지에 관하여는 의론이 분분한데, 일설에는 요제가 지금의 순평현 이기산 에서 태어났다고 하지만, 옛 사람들이 그 출생지를 갖고 성을 삼는 일이 많아서, 요제의 성은 이기( 伊祁)가 된다. 이기산( 伊祁山)도 그래서 요산(尧山)이라고도 불린다. 일찍이 한나라 평제(平帝) 문시(文始) 5년(BC 5년)에, 왕망(王莽)이 일찍이 곡역(曲逆)을 순평현(顺平县)으로 한 적이 있다. 현(縣)의 경내에는 이기산(伊祁山), 요모동(尧母洞),요제의 맏아들 주단(丹朱) 성(城)도 아직 있으며,이기산(伊祁山) 태자암(太子庵)에는 향불이 끊이지 않는다.
5、望都
5.망도
望都古名“庆都”,是尧帝之母庆都的出生地。据史料记载,尧母陈锋氏庆都居于都山,尧帝常登尧山南望都山,并以母亲之名庆都命名都山一带为庆都邑,以表达对母亲的思念之情。至西汉时期,高祖刘邦巡游至此,以为用圣母庆都命名地名似有不恭之嫌,于是改“庆都”为“望都”。
망도(望都)의 옛 이름은 “경도(慶都)”이고, 이곳은 요제의 어머니 경도(庆都)의 고향이다. 사료에는 요제의 어머니 진봉씨(陈锋氏) 경도(庆都)가 도산(都山)에 살았고, 요제는 늘 요산에 올라 남쪽의 도산(都山)을 바라 봤으며, 어머니의 이름 경도를 가지고 이 도산(都山)일대를 경도읍(庆都邑)이라고 했고, 이로써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해 드렸다. 서한(西漢) 때에 이르면 한고조 유방이 이곳을 순시하는데, 가장 존경하는 요제의 어머니 경도(庆都)의 이름을 가지고 지명을 한다는 것이 불공(不恭) 스럽다고 생각되어, 경도(庆都)를 망도(望都)로 바꾸었다.
옮김 : 유 풍종
번역 : 유 경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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