刘氏宗族 王者之风
刘氏宗族 王者之风
옮김. 편집 : 유풍종
번 역 : 유경상
刘姓复姓始祖——士会
刘氏宗族 王者之风
刘累是有史记载的刘姓始祖,然而他和他的后人先后改称御龙氏、豕韦氏、唐氏、杜氏、司空氏、范氏等,其本氏“刘”反倒不常见。
유루는 유사 이래 처음 유씨 시조로 기록되고 있으나, 유루와 그의 후손들은 연이어 어룡씨, 시위씨, 당씨, 두씨, 사공씨, 범씨 등으로 바꾸지만, 기본 성씨인 유씨는 오히려 보기 드물었다.
后来,刘累后裔士会的一支子孙,生活在当时的秦国,才又复称刘氏。刘氏是在什么背景下“复兴”的?“复称刘氏”的始祖是谁?
후에, 유루 후손 사회의 한 자손이 당시 진(秦)나라에서 생활하게 됨으로써, 겨우 그 성씨를 유씨라고 다시 부르게 된다. 유씨 성은 어떤 배경 하에 다시 부르게 되었을까? 다시 부르게 된 유씨성의 그 시조되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城濮之战(성복전쟁)
士会:刘、范、随等姓的 共同显祖
사회(士會)란 유씨(劉氏), 범씨(範氏), 수씨(隨氏)등 성의 공동 선조 되는 분이다.
浙江财经学院副教授刘佑平在《中华姓氏通史·刘姓》一书中说,在刘姓的早期历史中,除了刘累之外,还有一个著名的人物,就是士会。刘累是有史记载的刘姓始祖,而士会的一支后裔,则是刘氏后人公认的“复姓始祖”。
절강재정학원 부교수 유우평은 “중화 유씨 통사. 유성”이라는 책에서 말하기를, 유씨 성의 조기 역사를 보면, 유루 외에도, 또 하나의 유명인물이 있는데, 그이가 곧 사회(士會)란 분이다. 유루는 역사가 기록된 첫 유씨 시조이며, 사회(士會)의 후손 중 일파이다. 바로 유씨 후손들이 다 같이 인정하는 복성시조(復姓始祖)인 것이다.
城濮之战,
是周襄王二十年(公元前632),晋、楚两国在魏国城濮(山东鄄城西南)地区进行的争夺中原霸权的首次大战
성복 전쟁이란,
주나라 양왕 20년(BC 632년),진초(晋楚) 두 나라가 위나라 현 산동성 견성(鄄城) 서남쪽에 위치한 성복(城濮) 지구에서 이루어진 중원 패권 다툼의 첫 전쟁을 말한다.
公元前632年,晋楚之间爆发了一场著名的战役,就是城濮(今山东鄄城西南)之战。
BC 632년, 진초(晋楚) 년간 에 유명한 전쟁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의 산동성 견성서남에서 있었던 성복(晋楚) 전쟁이다.
当时,楚国联合陈国、蔡国、郑国、许国,出兵十余万,晋国派出的军队,只有五万多人。这场战役实力悬殊,楚军志在必得,而晋军采取了“退避三舍”的战略方案,最终大获全胜,从此奠定了晋国的霸主地位,这场战役也成为历史上以少胜多的经典战例。
당시, 초나라 연합국이었던, 채나라, 정나라, 허나라의 출병 병력은 10여만 이었고, 진나라가 보낸 군대는 겨우 5만여 명이었다. 이 전쟁에서 서로 실력차이가 많이 났는데, 초나라 군대는 필승의 뜻을 다지었지만, 진(晋)나라 군은 회피하는 전략을 택하여 진나라 군대가 결국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쟁에서 진(晋)나라는 패권의 지위를 다져 놓게 되고, 이 전쟁이 바로 역사상 유명한 소병력 대승 전쟁이라는 하나의 특수한 전례(戰例)로 남긴다.
当时,士会在军中代任戎右之职,作战十分勇猛,在战役中起了关键作用。战后,他受到重用,先后辅佐了晋文公、晋襄公两位霸主,成为晋国的股肱之臣。
당시, 사회는 군중(軍中)에서 융우라는 직을 대신 맡게 되는데, 작전은 용맹스러웠으며, 작전 중에 핵심역할을 하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그는 중용되고, 이어서 진문공, 진양공 두 분 맹주를 모시게 되고, 곧이어 진(晋)나라의 군주가 가장 믿는 신하가 된다.
因为功勋卓著,士会在原有封地随(今山西介休西南)的基础上,又加封了范邑(今河南范县)。所以,他不仅是刘姓的显祖,也被范氏、随氏后人尊为得姓始祖。
공훈이 뛰어나자, 사회는 원래 봉지였던, 수(지금 산서성 개휴 서남쪽에 위치한 지명) 지역을 기초로 해서 범읍(현재 하남성 범현)까지도 갖게 된다.그래서,그는 유성의 뛰어난 선조가 될뿐더러, 범씨, 수씨등 후손들로 부터도 득성 시조로써 존경받게 되었다.
复称刘氏 (복칭유씨)(復稱劉氏)
士会后裔在秦国复称刘氏
사회의 후손들이 진(秦)나라에서 유씨(劉氏)로 불리다.
公元前621年,晋襄公去世,太子夷皋年幼,为了国家命运,大臣们商议后决定废太子,改立晋襄公的弟弟公子雍。士会与先蔑出使秦国,迎接在秦为官的公子雍回国继位。
BC 621년 진양공이 죽고, 태자이고(夷皐)가 어리게 되자, 국가 운명을 위한, 국가대신들 회의에서 태자를 폐위시키기로 결정한 후, 진양공의 동생 공자옹(公子雍)을 세우게 된다. 사회와 선멸이 진나라 사절로 가자, 진나라에서는 공자옹이 돌아와 관직의 지위를 계승한 만큼이나 영접한다.
不料,士会和公子雍返回晋国的途中,晋国政局发生了戏剧性的变化:大臣们迫于晋襄公夫人缪嬴的压力,立年幼的夷皋为国君,并派兵阻击秦军,阻止士会和公子雍回国。士会被迫出逃到秦国避难,开始了长达7年的流亡生涯,他的妻儿、族人也先后逃到秦国与他会合。
뜻밖에 사회와 공자옹이 진(晋)나라에 돌아오는 도중, 진(晋)나라 정국은 마치 연극 같은 변화가 발생하는데 : 진양공 부인 무영(缪嬴)의 압력이 조여오자, 이제 갓 삼십쯤 된 이고(夷皋)가 왕이 되고, 곧 병력을 파병하여 진(秦)나라 군대를 막아 내면서, 사회와 공자옹의 귀국을 저지시킨다. 사회는 진(秦)나라로 쫓겨 도망가 몸을 피하고, 이어서 7년의 기나긴 망명의 생애에 들어간다. 그의 처, 친척들도 곧 이어 진(秦)나라로 도망쳐 그와 만나게 된다.
士会在秦国也很受重用,成为秦军的谋士,帮助秦国夺取了晋国多座城池。公元前614年,晋国大臣集会商议后,决定为士会平反昭雪,并最终请他回到了晋国。
사회는 진(秦)나라에서 중용되게 되며, 진(秦)나라에서 모사(謀士)로 대우받게 되고, 진(秦)나라를 도와 진(晋)나라의 많은 도시들을 탈취하는데 도움을 준다, BC 614년 진(晋)나라 대신들이 모여 회의를 열고, 사회가 설욕을 그만두고, 결국 그가 진(晋)나라로 다시 돌아오도록 결정했다.
《左传》记载,士会返晋后再受重用,后来更执掌国政。在他的治理下,晋国“端刑法、缉训典、国无奸民”,国力日益强盛。后来,士会在范邑去世,谥号为“武”。
좌전에는, 사회가 진(晋)나라에 다시 돌아 온 후 다시금 중용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후에 더욱 국정을 장악케 되었다고. 그가 통치하면서, 진(晋)나라는 형법을 정비하고, 법전들을 정리하고, 나라에는 간신이 없어졌다. 그리고 나라는 더욱더 강성하게 되었다. 그 후, 사회는 범 읍에서 사망한다. 그리고 임금은 그에게 무(武)라는 시호를 내린다.
士会归晋后,他的一部分子孙留在生活了7年的秦国。这支子孙没有自己的领地,也没有任何官衔,便去掉了杜氏、士氏、随氏、司空氏等称号,复称祖先刘累的刘氏。至此,刘氏才算最终固定下来,但已经不复显赫,在秦国的地位几乎与普通百姓没有两样,同样要承担秦国繁重的徭役。直到400多年后,这一支刘氏子孙中的刘邦建立西汉王朝,刘氏才又重新辉煌起来。
사회가 진나라에 돌아온 후에도, 그의 일부 후손들이 7년이나 살아왔던 진(秦)나라에 남는다. 이들 남은 후손들은 그러나 자기들의 영토는 없었을 뿐 아니라 어떠한 관직도 없었다. 그들은 두씨성, 사씨성, 수씨성, 사공씨 성등의 칭호를 버리고 다시 유씨 성으로 되돌아온다. 이에 이르자, 이제 유씨들은 최종적으로 유씨로 정해진다. 그러나 이미 다시 전의 그 혁혁하던 위치를 되돌리지는 못하고, 진(秦)나라에서 지위라야 이제 겨우 보통 백성 수준에 머무른다. 이렇게 되자 진(秦)나라의 부역조차도 지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이제 400여년 후에는 이 일파의 유씨자손 중 유방이 건립한 서한왕조 유씨만이 겨우 다시 빛을 발휘할 수가 있었다.
河南商报记者看到,在中华刘姓始祖苑的世界刘氏纪念馆里,士会的塑像赫然在列,旁边的牌子上注明为“累公三十六世裔孙”。
하남상보 기자는 중화유씨 시조원의 세계유씨 기념관에서 사회(士会)의 소상(塑像)이 잘 진열돼 있고 옆에는 팻말에 유루공 36세후손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았다.
宗族文化 (종족문화)
刘姓的宗族文化,有一种王者风范
유성의 종족문화는 일종의 왕자 풍모가 느껴진다.
每个中华姓氏,都有自己的家风和宗族文化。比如,朱姓尚武崇学,孔姓崇文重礼,黄姓看重孝道和开拓精神,蔡姓的家规一半与读书有关,等等。
모든 중화 유씨, 모두 자기의 가풍과 종족문화를 갖고 있다. 비유하자면, 주씨 성은 상무정신, 향학정신을. 공씨 성은 글 읽기를 중상하고 예를 중시하며, 황씨 성은 효를 중시하고, 개척정신이 있으며, 채씨 성은 가정 규범들이 모두 독서와 유관함 등등의 예와 같다.
刘佑平认为,与其他姓氏不同的是,刘姓的宗族文化中,透露的是一种王者风范。
유우평은 유씨 성이 기타 성씨들과 다른 점은 유성의 종족 문화 중 특징은 왕자풍모가 뛰어난 점이라고 한다.
如今,不少刘氏族谱上,都会写上“御龙精神”4个字,相当一部分刘姓望族以“御龙堂”为堂号,刘姓子孙常被教导:“你是干大事的人。”中华民族自称“龙的传人”,而刘氏则以“御龙”自居,这种自命王者的霸气便可概见。
지금, 적지 않은 유씨 족보에서 보면, 모두 어룡정신이라는 네 글자를 볼 수 있으며, 이는 일부분 유씨 성이 명망 있는 성씨로써 어룡당을 당호로 삼고 있음에 부합한다. 유성 자손은 늘 너는 큰일을 할 사람이다. 라고 들으며 자라왔다. 중화민족은 용의 계승자요, 유씨는 어룡이라고 자처하면서 이러한 스스로 왕자의 패기를 스스로에게 명하고 사는 모습을 느낄 수 있다.
如今,刘姓的“王者之风”和“御龙精神”,早已脱离了王侯将相思想的桎梏,成为刘氏子孙激励自己奋发向上的精神动力。
오늘날, 유성의 왕자지풍과 어룡정신은 일찍이 왕후장상의 질곡에서 벗어나, 유씨자손이 자기분발의 정신으로 정신동력을 격려해 오게 된 것이다.
三祖遗训 (삼조유훈)
刘姓的“三祖遗训” (유성의 삼조유훈)
河南商报记者发现,不少刘氏族谱上的“祖训族规”中,都誊抄着三则祖宗的遗训,这就是“三祖遗训”。
하남상보 기자는 적지 않은 유씨 족보상의 조훈족규 중에서 모두 삼즉조종의 유훈을 갖다 쓰는데 이는 곧 삼조유훈인 것이다.
这些遗训中的一些名句,其实也是整个中华民族的传统价值观念。这些遗训的“作者”,在历史上全都赫赫有名:汉高祖刘邦、光武帝刘秀、蜀汉昭烈帝刘备。
이러한 유훈가운데는 몇 가지 유명한 구절도 있는데 이는 온전한 중화민족 전통 가치개념인 것이다. 이러한 유훈의 작자는 역사상에 모두 유명한 분들의 이야기로써, 한고조 유방이라 던지, 광무제 유수라 던지, 촉한의 소열제 유비 등의 이야기다.
西汉高祖遗训 (서한 고조 유훈)
夫运筹帷幄之中,决胜千里之外,吾不如子房;镇国家,抚百姓,给饷馈而不绝粮道,吾不如萧何;连百万之众,战必胜,攻必克,吾不如韩信:三者皆人杰,吾能用之,此吾所以取天下者也!
진중에서 전장의 승리를 계획함에 있어 나는 장자방 즉 장량의 국가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편안히 하며, 군량미를 준비하고, 그 운반을 도모함에 있어 나는 장자방 즉 장량에 미치니 못하고, 백만의 군중을 이끌고 필전승하고, 공격해 이김에 있어서는 소하를 당하지 못하고, 나는 한신만 못해서 이 세 인걸만 못하지만 나는 능히 이들을 다룰 수가 있나니, 고로 나는 천하를 얻은 것이다.
东汉光武帝遗训 (동한 광무제 유훈)
舍近谋远者劳而无功,舍远谋近者逸而有终。故曰:广文地者荒,务文德者强;有其有者安,贪人有者残。
가까운데서 찾지 않고, 먼데서 구하는 자에게 공은 없나니, 먼데서 찾지 않고, 가까운데서 구하는 자에게 결과도 있느니라. 옛 말 에 이르기를 넓은 땅은 탐해도 지켜내지 못하여 실익이 없고, 덕 있는 자가 오히려 강 하나니라, 이는 덕 있는 자는 편안하고, 탐인은 잔인한 까닭이다.
蜀汉昭烈帝遗训 (촉한 소열 제 유훈)
勉之,勉之,勿以恶小而为之,勿以善小而不为。惟善惟德,可以服人。
부지런 하라, 부지런 하라, 악한 소인이 되지 마라, 선이 작다고 하기를 마지않아야 하며, 선만이 덕이고, 능히 사람을 다스릴 수 있느니라.
另外,刘姓著名的“祖训”,还有明初刘基的《传家宝》,其中的一些语句,在民间流传极广。
그러고, 유성의 저명한 조훈으로는 또 하나 명나라 초기에 유기의 전가보가 있는데 그중의 몇 귀 절은 민간에서 지극히 널리 전해지고 있다.